직업엔 귀천이 없단 거짓말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와 쌍벽을 이루는 새빨간 거짓말

‘직업엔 귀천이 없다’


영국으로 어학연수 간 나영이한테 며칠 전 전화가 왔다.

영국과 한국이면 지구본의 정 반대편에서 통화하는 셈일 텐데 어찌 그리 음성이 깔끔하던지.

게다가 유선도 아니고 휴대폰인데 어쩜 이리 감도 높게 잘 들리냐고 감탄했는데, 

한 몇 분 전화하다 뚝 끊겨 버리더라고 ㅡ,.ㅡ…


다시 전화한 나영이가 이 곳 전기나 수도, 통신 서비스 같은 건 별로라 그러더라.

은행계좌 하나 만드는 것도 무슨 증명서가 필요하니 어떠니 해서 너무 복잡하고.


그런데 한국이 그립긴 해도 별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고 하더라.

그리고 이 글의 주제가 될 이야기를 꺼냈지.


영국 애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지, 예를 들어 제조업처럼 몸 쓰는 일을 해도 남 이목 신경 안 쓰고 자기 삶을 즐긴다는데 우리 나라는 아니라는 이야기.


장하준 교수가 말하듯, 만약 고졸이면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스웨덴 같은 유럽에서 사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거지.

예능 프로에서 연예인들이 자기를 비하하는 상황에서 내뱉는 말이 ‘그냥 기술이나 배워야지’ 인 걸 보면 우리나라에서 기술자가 얼마나 천대받는 계급인지 알 수 있다.

박노자가 책을 통해 알려준 노르웨이처럼, 버스운전기사가 대학교수보다 많은 임금을 받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직업의 귀천은 어떻게 나눠 지나.

인터넷에서 결혼정보 사이트의 직업별 등급표가 나돈 적이 있었다.

TV 프로그램 제작팀이 해당 결혼정보 회사를 찾아가 정말 이런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냐고 물으니 회사 관계자는 극구 부인하더라.

하지만 결혼 적령기 남녀를 철저히 수치화해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매칭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곳이니 분명 내부 분류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인터넷에 나도는 직업 등급표가(그것이 실제 결혼정보회사 것이든 아니든) 바로 우리사회의 직업귀천 배치표다.

수능 다음날 4절지 크기(맞나?)에 우리나라 대학 200개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욱 늘어놓은 배치표처럼 우리나라 직업 및 기업 분류를 1등급부터 9등급까지 나열해 놓았다.

아, 외국 처자를 들여와야 하는 농촌총각 등의 경우 배치표 안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대신 마이너리그를 전담하는 결혼정보회사가 따로 존재하지.(그 유명한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카피를 개발한 그들)


우리 사회가 서열 매기기를 얼마나 좋아하나면, 대학입시 게시판에 들어가 보면 그 해 배치표 가지고 일 년 내내 이러니 저러니 하며 논다. 

어떤 대학은 높여야 되고 어떤 대학은 낮춰야 된다면서 웹 2.0의 쌍방향 소통, 직접 참여 정신을 발휘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는 거다.

그렇게 일 년을 놀다 다음해 배치표가 나오면 또 새롭게 업데이트 된 배치표에 어떤 변화가 생겼나로 아우성.


직업등급표도 네티즌으로부터 대학배치표와 거의 똑같은 놀이도구가 된다.

이 직업은 등급을 올려야 된다느니, 투표로 결정하자느니, 내가 수정해 봤는데 이것이 진리라는 둥…


직업배치표의 구조를 아주 단순화 하면 이렇다.

전문직 -> 공사/공무원 -> 대기업 -> 중소기업 이하 듣보job

‘사’자 돌림의 전문직은 건국 이후부터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으로 항상 직업 귀천 구조의 정점에 서 있다.

그리고 평범해 보이는 수준으로 내려가면 대기업 사원이다.

그럼 우리나라의 평범한 젊은이들은 대기업에 다니는가?


9988

우리나라 기업 수의 99%, 고용의 88%를 중소기업이 담당하고 있다는 구호다.

역으로 말하면 직장인 중 12%만이 대기업에 다닌다는 이야기다.

이러니 12%의 대기업이 일자리 늘린다고 용써봐야 혜택 받는 이들은 얼마 안 된다.

그냥 88%의 중소기업 일자리가 지금보다 더 괜찮아 지는 게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가는 거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내 자식이, 그리고 내가 당연히 대기업에 들어갈 줄 알고 모두 대기업 일자리 늘어나는 것만 바라 보는 거다.

이러니 대기업 노조 때문에 공장 못 돌려 큰일이라며, 노조꾼들 때문에 경제 어려워 진다는 계급배반 사고를 하게 된다.


‘나는(혹은 내 아들은) 당연히 대기업에 들어갈 것’

이런 생각을 하면 12%가 일반적인 것이고 88%는 변두리, 패배자의 영역이 되어 버린다.

12%의 주류와 88%의 비주류가 생기는 것이다.

88% 비주류 역시 이직이나 자식을 통해 12% 주류에 편입되는 꿈을 꾼다.

한 마디로 12%에 있는 사람들이나 88%에 있는 사람들이나 오직 12% 그 이상만 바라보고 12%사람처럼 생각하는 것.

이는 비단 대기업과 중소기업이라는 직장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계급문제의 전체적인 그림이 아닐까.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어찌 보면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귀천을 못 보게 하려고 지배계층이 만들어낸 눈 가리개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실제 직업에 귀천이 없는 쪽으로 우리 사회는 움직여야 한다. 조금씩 조금씩이나마

비록 지금은 법 앞에 딱 만 명만 평등하지만, 앞으로는 모두가 평등해져야 하는 것처럼.


나 역시 ‘당연히 대기업에 들어갈 것’ 이란 생각을 하던 사람이다.

그런 생각으로 보낸 백수생활 10개월.

88 : 12 의 세계를 바라보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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