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독서토론 후기

  1. 왜 그토록 ‘이직 사유’에 집착하는가

이 책은 소설이 아닌 수필이기에. 장르 특성을 고려하면 저자 이직의 개연성을 반드시 납득시켜야 할 필요는 적다. 다만, 이 책이 65세에 박물관 경비원으로 정년퇴직하신 분이 기념으로 쓴 수필집이거나, 미학 전공자가 박물관을 오랫동안 방문하며 남긴 기록이 아니라. ‘뉴욕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뉴요커 잡지사에서 일하던 직장인이 갑자기 박물관 경비직으로 전직함’이라는 대비가 중요한 차별점이기 때문에. 비록 수필집이지만 저자의 이직 당위성을 계속 납득해보려고 시도하게 된다.

다만, 형의 죽음이 주는 슬픔의 경중을 따지는 건 아니다. 개개인 아픔의 크기는 타인이 오롯이 헤아릴 수 없으므로, 형이 아니라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이나 너무 아끼던 게임카드가 분실됐다 해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을 거다. 저자의 상실감에 대한 충분한 서술이 있었다면 말이지.

반대로, 뉴요커에서 박물관으로 이직하는데 뭔 그리 치밀한 서술이 필요한가 되짚어보면. 이건 ‘직장’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독서토론 뒤풀이 자리에서 의견을 나누며 확신을 가지게 됐는데. 한국은 세속적 기준에서 ‘더 좋은 직장’에서 ‘덜 좋은 직장’으로 옮긴다는 건 일종의 사회적 사형선고다. 즉, 물리적으로 죽은건 형이지만. 이직을 하면 사회적으로 내가 죽는다.

한국 드라마였다면, ‘형도 내가 더 열심히 일하길 바랄거야. 형, 나 꼭 뉴요커에서 최고가 될게’라는 독백과 함께 다음날 출근부터 한층 냉철해진 주인공 모습이 페이드인 되지 않을까.

  1. 맥락이 거세된 전시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작품은 필연적으로 원래 있던 공간에서 옮길 수 밖에 없다. 컨텍스트가 사라진 텍스트를 온전히 해석하기 어렵듯, 원래 놓여있던 시/공간이 거세된 채로 보는 작품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보통 가로세로 수십센터미터쯤 되는 하얀 작품 해설 딱지만으로 그 시공간을 다 채울 수 있을까?

일전에 지역 문화유산 보존 방식에 대한 지리학자와 역사학자의 견해 차이를 들은 적이 있는데. 마을을 재개발하면서 오래된 방앗간을 문화유산으로 보존하자는것 까진 합의가 이루어졌다.

역사학자는 방앗간을 해체해 재개발되는 한 귀퉁이에 이전한 후 잘 조립해 놓으면 된다는 쪽인데, 지리학자는 방앗간이 위치하는 ‘마을 초입’이라는 그 자체가 메시지이며 자리를 옮기면 반쪽자리 복원이 된다고 반대했다는 이야기.

  1. 기본이 있어야 개성이 있다

위 2번에 이어서, 작품 맥락을 알기 위해 그냥 무조건 해설을 들어야 한다. 그게 이름이 도슨트건 문화해설코스건 동네 참견쟁이 주민의 수다건 뭐건. 그 공간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한테 듣고 채워야 한다.

만화책 ‘힙합’에서 ‘기본이 있어야 개성이 있다’했다.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봐봤자 뭐하나. 남의 다리 긁는 소리나 할 뿐. 채워야 보인다.

  1. 내가 아는 최고의 작품은 임진각

작품이 놓인 공간, 즉 작품 그 자체를 넘어 작품이 놓은 맥락까지 본다는 관점에서. 내가 아는 최고의 작품은 임진각 아닐까. 세계 유일 최후의 분단국가. 남북한이 그린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선’을 감상하는 곳이잖아.

전망대 바로 앞에 펼쳐진 논밭이 북한 땅인줄 알고 ‘저렇게 가깝냐’며 놀라던 내 친구 반응을 보면. 임진각은 그 선 너머의 북한을 감상하려고 올라서는 발판임이 분명해.

  1. 박물관은 각자의 가치 잣대를 찾아가는 공간 아닐까

사회적 가치 척도와 개인의 가치 척도를 분리해 생각하자.

사회적 가치는 대개 가격이라는 잣대로 매겨진다. 반면 개인의 가치는 말 그대로 사람마다 다르다. 내게 중요한 게임 카드가 어머니한테는 아들 공부 방해하는 천하의 요물 쓰레기일 수 있는 것. 당연히 사회적 가치와 개인의 척도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박물관에는 일단 사회적 가치, 즉 가격으로 치면 얼추 수천만원에서 수억원 이상을 호가하는 것들을 한번 체로 걸러 전시해놨다. 그 사회 구성원 누가 보더라도 얼추 가치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들로 일단 채워 넣은 것.

그러나 박물관 소장품을 하나씩 다 가격을 매겨 내림차순 정렬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면 전시는 아주 심플할 것.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정렬, 최고가순/최저가순 코스 만들고 최고가 top10 관람은 추가 요금 있으십니다.

박물관 물품은 시장에서 활발히 거래되지 않기에 가격을 정확히 매기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박물관 자체가 그 가치 평가를 관람객에게 넘겨주는 공간이기도 하지 않을까. 박물관이 모아둔 가치 덩어리들 중, 내가 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 감정의 시간을 우리는 관람이라고 표현하는 건 아닐지.

모두가 하나의 가치(=가격)를 따를 필요가 없다. 각자의 가치 척도를 발견하는 공간, 즉 내 안의 장터를 여는게 박물관 관람이란 행위 아닐지.

  1. 성장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세계에서 가장 성장한 도시를 꼽으라면 뉴욕, 그 성장기를 매주 게재하며 ‘남들은 이만큼 성장했으니 너도 어여 따라오라’고 재촉하는 게 주간 뉴요커.

작가의 형을 잡아먹은 암세포도 처음에는 무릎에서 아주 미약하게 시작했으나, 아메리칸 드림처럼 ‘성장’해서 본체를 잠식해 버렸다.

월간지, 주간지, 일간지. 이 모든 체계가 딱 월간 단위 주간 단위 일간 단위의 성장을 담고 있다.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여왕 명대사처럼, ‘같은 곳에 있으려면 쉬지 않고 달려야’하고, 노오력하지 않는 순간 밀려나고 사회적 사망 선고가 내려지는. 적어도 그럴거라고 불안해하는 곳이 한국의 서울이니. 이 부분은 작가의 심경이 와 닿는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 책이 많이 팔렸나?

효율 그 자체는 가치 중립적인 단어다. 유태인을 효율적으로 죽이기 위해 독가스를 만들거나, 죽음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IBM이 전산시스템을 개발했다거나. 이런 예처럼.

결국 무엇을 위한 효율이고 성장이냐. 나 자신이 정말 의도하고 원하는 성장인가. 떠밀려온 억지 춘향인가.

  1. 어떻게 거장이 될 수 있나

주구장창 써먹는 골든써클. why -> how -> what 으로 보자.

먼저 사명이 있어야 하고(이 일 왜하지?), 능숙한 기술이 있어야 하고(이거 어캐했누?), 이걸 계속해 나가기 위해 체력이 있어야 한다(A,B 고민할 시간에 A,B 다 해봄).

거장이란 표현이 무겁긴 하지만. 지금하는 이 일을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든다면. 애초에 이 일을 계속할 것인가를 고민해야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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