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의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는 추천사는 마케팅 문구로는 훌륭했지만, 소비자인 내게는 배신감을 줬다.
성해나 책이 넷플릭스보다 재미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둘의 재미가 좀 다르다.
마샬 맥루한 아재 이론에 따르면 넷플릭스는 상상의 여지가 적어 시청자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핫 미디어고. 책은 독자가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쿨 미디어다.
당연히 두 미디어 고유의 차이에서 오는 게 있지. 근데 이건 좀 심하네.
단편의 특성인지, 성해나라는 작가의 스타일인건지. 매 회마다 기승전에서 끝나는 느낌. 혹은 기승결?
넷플릭스를 대체하는 소설이라기에, 뇌 빼고 자아 의탁해서 보는 순수재미를 기대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공백이 너무 많아, 단편 하나를 다 읽고 나면. 그 읽은 시간만큼 더 능동적으로 남은 내용을 맞춰봐야하는 느낌.
소설의 내용 보다, 갑자기 끝나는 듯한 구성 자체가 내게 메시지를 던진다.
결국 나도 뻐킹 숏폼 회빙환 사이다 전개에 쩌든 콘텐츠 유저인가.
박정민 씨 다음에 쓸 마케팅 문구는 이걸로 하자.
‘템플스테이 왜 가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독서모임 단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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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와 밴드
각기 어른과 청년을 상징하는게 아닐까. 돈 버는 일과 돈 안 되는 일.
정확히는 당장 돈 안 돼도 좋고 폭발적인 잠재력은 있음. 대신 그 가능성이 희망고문이 되기도 해 괴로운 것. 그게 청춘. 반면 낚시는 확실한 환전 수단.
밴드 아지트가 원래는 아버지의 낚시용품 컨테이너였음. 이미 생업을 영위하는 어른의 공간이었다가, 밴드 연습실이라는 나의 청년시절 공간이었다가, 다시 낚시 컨테이너로 돌아가면서 어른이 된 나의 공간.
컨테이너는 대를 이어 어른의 현실이었다가, 청년의 가능성이었다가, 다시 다 자란 어른의 현실이 된다.
만화 20세기 소년에 나오는 아지트처럼. 청년기엔 어떤 형태건 생업과 분리된 물리적인 공간이 있지 않을까.
내게는 뭐였지? 아, 고등학교때 전교조 지부 모임공간이 그런게 아니었나. 나도 컨테이너가 있었네. 낮에는 낚시였다가 저녁엔 밴드가 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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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형 팀장과 관리형 팀장
자기 직무를 잘하면 관리자로 승진하는게 당연했던 한국형 조직체계라 더욱 자주 나오던 질문. 한국도 벤처기업 시대를 지나 스타트업 시대가 정착되며 이 질문 빈도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스페셜리스트냐 제너럴리스트냐. 커리어를 크게 투트랙으로 보면 선명하다. 직무 전문가에 적합한 인력은 계속 전문성을 키우는 스페셜리스트 트랙으로 가야하고. 이를 존중하고 구현해줄 조직 구조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관리자는 제너럴리스트다. 아니, 그 전에 관리라는 기술 자체도 하나의 전문기술로 취급받아야 하니 매니징의 스페셜리스트긴 하다.
불과 몇년 전 개발 직무가 엄청 환대받다 거품이 꺼져버렸는데, AI시대에는 관리자라는 직무가 각광받지 않을까?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지만 꼭 필요한 일’에 기회가 있다. 쓰레기나 하수처리 산업 주식에 투자하는 논리가 이런 식.
지금 20~40대 직원들, 즉 이미 확고한 관리직을 차지하지 않은 직원의 평균 심리가 ‘굳이 관리자는 안 하고 싶다’인데. AI로 완벽히 모든 산업이 재편되기 전까지 인력 관리는 필요하다. 심지어 AI로 완전히 대체되기 바로 직전까지 대체되지 않을 직무가 ‘최후, 최고의 책임을 지는 관리자’, 즉 CEO다.
지금 관리직에 대한 불만이 ‘책임과 보상의 불균형’인데, 이제 곧 보상쪽으로 추가 한껏 넘어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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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나영석, 신내린 무당
‘내가 더 이상 트렌디하지 않아졌다’에 대한 인정. 트렌드를 읽고 만들고 증폭하는게 일이던 사람. 그걸 한국에서 제일 잘 한다는 소리를 십수년 들은 사람. 그런 사람이 그걸 인정하는 건 얼마나 어려울까.
김태호와 나영석이 현역일 때 나영석을 좀 싫어했는데. PD라는 양반이 너무 화면에 나와 나대니까 괜히 싫은 느낌. 전에 없던 유형이라 거부감이 든걸까.
전성기 때는 김태호가 앞선다는 평가였다면, 현재는 역전된 느낌. 나영석이 침착맨에 나와 ‘더 이상 트렌드하지 않을 나이가 됐고, 지금의 내 활동도 일종의 노욕’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듣고 나선. 이제 20년 전 내 개인적 미움과 박한 평가를 갱신해야겠다 싶더라.
성공의 역설이라고, 성공한 이들 상당수는 자기가 성공해 온 방식에 발목 잡혀 처절하게 패배한다.
신내린 무당 아재도 자기 객관화가 잘 됐다면. 더 이상 칼날 같은 트렌디함을 걸을 수 없단 걸 인정했다면. 무속인 커뮤니티 같은 거 만들어 운영하는 식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바꿨다면.
혹은 유튜브에서 조롱거리가 된 걸 계기로, 오히려 숲툰훑처럼 조롱을 콘텐츠로 승화할 수 있었다면.
근데 그게 되면 진짜 미친 범상치 않음이지. 기존의 자기 성공 방식을 부정하는 건 그간의 내 모든걸 부정하는 느낌이 들거든. (잘못된 정보라지만)오래산 독수리가 부리를 깨고 새로 부리 돋아나 또 살아온 만큼 더 산다는 것처럼.
근데, 백마디 천마디 위로도 변명도 필요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하거나 나아가려면 스스로를 부정해야 할 때가 온다. 그 때가 지금인 건지 깨닫는 것조차 능력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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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터라는 직무
신문방송을 전공하고, 홍보팀으로 입사해, 마케팅 관련 업무를 하며 다짐하던 개념이 있다.
나와 대중(타겟/공중)의 취향을 분리하자. 내가 좋아한다고 대중이 좋아할리 없고, 내가 싫어한대서 같이 싫어해줄리도 없다.
마케팅 산출물은 타겟에 대한 데이터 분석(우리 제품 살 확률이 가장 높은 이들을 뽑아보자)과 인문학적 통찰(그들이 뭘 좋아할까, 정확히 어떤 결로 빚어야해?)을 결합해 만들어야 하는데.
요즘은 시대가 철저하게 분화된 시대인지라. 기계적으로 단련된 마케터 보다. 그냥 최소한의 메타인지가 되는 덕후가 자기 분야 마케팅하는게 최고인듯 싶다.
혹은, 고도로 뛰어난 마케터라면 업에 대한 통찰을 통해 덕후에 빙의할 수도 있겠지.
혼모노는 내가 소비자로서 욕하고 악플다는 상품이지만, 혼모노 마케터는 일 잘한다. 시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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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짧은 단편
어느 장르건, 감동을 주는데 길이가 본질은 아니다. 까먹지 않으려 다시 붙여넣는 단편.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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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 필요없다는 사람들
세상사가 대부분 한쪽으로 쏠렸다가 너무 치우치면 다시 반대쪽으로 쏠리고. 이렇게 좌충우돌 진자운동을 계속하며 세월 가는 듯하다.
학창시절 워낙 4지 선다 정답을 강요받는 교육을 똑같이 받고 자란 어른이 만든 사회라 그런지. 콘텐츠에 대한 정답/해설에 대한 거부감도 꽤 퍼진 듯. 이게 너무 극단으로 가버리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의식 과잉인 상태’가 될지도.
한창 시집을 의식적으로 뒤적여볼 때가 있었다. 목표가 도서관 시집 코너 전체를 다 보는 거였는데. 한 20권쯤 보다 흐지부지 포기하며 든 생각.
문학과지성 얘네는 시집 내기 전에 졸업증명서부터 때 보나. 10권 중 7권은 서울대네. 시집 첫 부분에 작가의 말이 꼭 들어 있는데. 이건 고학력 놈팽이 낱말퍼즐 인가.
한창 기분이 나빠진 후, 시집 맨 마지막에 꼭 붙어있는 해설을 만나는데. 그나마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해주는 친절함(절대적은 아니고 상대적 친절)에 감사하며 해설은 꼭 필요하구나 싶었다.
그 이후 유적지를 가건 책을 읽건 해석은 무조건 읽고 듣고 따라간다. 나보다 먼저 간 이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나의 기존 에고는 바닥에 내팽개친 후,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며 받아들이고. 추후 나의 식견이 돋아났을때 반론하자. 이게 나의 요즘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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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넘기의 어려움
모든 토론, 아니 모든 모임이 그렇겠지만 최대한 자유롭게 이야기하자는 독서토론 모임조차도 선을 넘어 보기는 진짜 어렵다.
예의범절이나 법적인 선을 말하는 게 아니라, 솔직한 자기 생각을 표출하는 마지노선.
인간은 속한 집단의 생리와 분위기, 여기서 나오는 지켜야 할 선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다. 다른 나라에는 마땅히 번역할 단어가 없는 ‘눈치’라는 특별한 단어가 사회의 중요한 작동기제인 나라인지라. 그 집단의 올바름으로 여겨지는 반대편의 논리와 사고까지 깊게 들어가는 건 어렵다.
몇번씩 토론에서 ‘아 저기까지구나’ 싶은 순간을 보면 좀 아쉽다가도. 그나마 그 마지노선 앞에 구축한 참호까지 가는 것만도 대단하다 싶다.
지구평평이 책 토론때 이미 새삼재삼 확인했지만. 말로는 자유롭게 이야기하자 하지만 진짜 어렵다. 아니, 어지간하면 불가능을 상정하고 이야기하는게 맞다.
적어도 노력하자면. 악마화/허수아비화의 반대말인 ‘선의의 해석’을 전제로 하고 논의해야한다. 악마화는 한 단어면 되지만, 선의를 구체적으로 해석하는 길은 지난하다. 보통은 아예 입구에서 돌아서 버리기 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