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김규항

믿고 보고 두 번 보고 시간 지나 또 보는 김규항 형님의 신작이다.

기도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은 없다.
사람에겐 가진 소중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능력이 없다.
형식이 무엇이든 기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위험하거나 적어도 섣부르다.

=> 기도하자. 소중한 것이 떠나기 전에 깨달으려면.


자기를 성찰한다는 건 자기만 생각하지 않는 것.
남 생각도 하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결국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다.

……중략……
모든 운동엔 두 가지 필수적인 덕목이 있다. 첫째는 자기가 하는 운동에 대한 분명한 ‘자부’이고, 둘째는 자기가 하는 운동이 운동의 일부라는 ‘겸손’이다. 자부가 없는 운동은 비루해지고, 겸손이 없는 운동은 빗나간다.

=> 일에 대입해 봤다. 내가 하는 일이 우리 회사의 중요한 일이라는 자부, 하지만 내 일도 결국 회사일의 일부라는 겸손. 이 둘이 함께 필요하다. 아마 조직이 크고 직급이 낮을 수록 ‘자부’가 부족해지지 않을지.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하고.
사람은 내적 음성과 대화하고 외적 음성과도 대화할 때 비로소 외롭지 않다. 우리,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건 대게 내적 음성과의 대화다.

고독과 외로움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차단된 고통이다. 자신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까. 고독을 피한다면 늘 사람에 둘러싸여도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 용맹하게 고독해야 한다.

‘남이 보기에 내가 어떤가’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혼 없는 좀비가 되지 않는 비결은 ‘내가 보기에 나는 어떤가’를 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혼자일 수 있는 시간과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힘.

성숙한 종교인은 다른 종교를 ‘같은 산을 오르는 다른 등산로’라 여긴다.

훌륭한 신앙은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신앙은 신의 뜻을 온전히 따르려 하면서도 신의 뜻을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는, 신 앞에 겸허히 선 상태이기 때문이다.


“힘 내!” 라고 쉽게 말하는 건, 남의 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위로의 의미로든 충고의 의미로든 고통의 객관성(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생각해봐, 따위)을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고통엔 현재성이 있을 뿐이다.

=> 나, 지금 당장, 여기서, 아파 죽겠다! 이게 고통의 현재성. 어떤 은유나 격언도 감히 들어서지 못하는 영역!

많은 경우에, 다른 이의 고통에 연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침묵과 절제다. 침묵 없이는 잘 말할 수 없고 절제 없이는 잘 행동할 수 없다. 그러나 말해야 할 순간에 침묵하고 행동해야 할 순간에 절제하는 것처럼 비굴한 일은 없다.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남보다 많이 가지고 남은 걸 나누어주는 게 아니라
남보다 많이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나눔은 고통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하지만, 연민에만 그칠 때 나눔은 사람을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룡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쇼로 전락한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 쇼에 참여함으로써 그런 고통스러운 현실에 자신의 안온한 삶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지적 의심을 씻어낸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우리가 미안해해야 할 아이가 있을 뿐.

부자란 다른 사람들의 몫을 더 많이 차지한 사람이다. 그런데 착한 부자는 다른 사람의 몫을 차지하는 것도 부족해서 그들의 착함까지 차지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이상 착하지도 않고 부자와 마찬가지로 탐욕스럽다고들 한다. 자기 몫을 빼앗긴 사람이 착하기까지 해야겠는가.

=> 착할 수 있는 여유, 억척스럽지 않아도 되는 여유. 그게 가진 자의 여유


담배를 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끊는 것’이다. 나머지 방법들은 실은 담배를 끊는 방법이 아니라 담배에 대한 미련을 표현하는 방법들이다.

=> ‘한 권에서 한 줄만 건져도 좋다.’는 내 지론에 따르면, 이 책에선 이 한 줄만 건져도 좋다. 그냥 하는 것!


더러운 여자는 없다. 더러운 게 있다면 여성을 깨끗한 여자와 더러운 여자로 구분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폭력, 그에 기반한 우리의 싸구려 정의일 것이다.

제도 밖의 사랑이 불륜이라면 사랑 없는 제도 또한 불륜이다. 결혼의 첫 번째 조건이 사랑이 아님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불륜의 사회가 불륜을 비난하는 풍경은 우습고 가련하다. 타인의 불륜보다 내 불륜은, 사랑을 잊어버린 나를 먼저 슬퍼할 것.

그 녀석은 엑스포만 피는 나를 변태라고 놀리곤 했다. 맞는 말이다. 게이가 변태라면 남들 디스 필 때 엑스포 피는, 딱 그만큼의 변태다. 과연 누가 변태인가. 꼴리면 하고 땅기면 살고 싫어지면 헤어지는 그들이 변태인가, 돈 때문에 하고 계급 때문에 살고 싫어져도 못 헤어지는 우리가 변태인가. 정말이지 누가 더 변채인가.

동물사랑은 동물의 삶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동물을 사랑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인간이 그들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 대부분의 동물 문제는, 인간이 해결하려 들지 말고 그들 앞에서 사라지면 자동 해결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나는 사는 꼴에 걸맞지 않게 소리 높이거나, 그 소리에 걸맞지 않게 한가롭게 살고 있다. 훨씬 더 정열적으로 살거나, 훨씬 더 검소하게 써야 한다.

=> 덜 말하고 더 행동해야 한다. 의미 없는 움직임 말고 실천 말이다.




책 정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153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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