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씹을 거리가 많은, 영양가 높은 토론이었다. 운동도 토론도, 결국은 양이 질을 만드는게 아닐까? 길게 오래 이야기하다보면 결국 논의의 질도 높아지는 것.
모든 토론은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 혹은 합의부터
한글로 된 ‘감정’이라는 단어를 똑같이 읽고 쓸 수 있다 해서 감정에 대한 상세 정의까지 모두 같을 수는 없다. 게다가 기존 학계 주류에 반한다는 ‘구성주의 관점’ 같은 새로운 개념이라면? 아직도 본질주의적 관점과 구성주의적 관점이 왜 완벽히 배치되는건지 이해를 못하는 나.
감정에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는 게 본질주의 주장이라면, 구성주의는 그 실체까지는 인정하되 그걸 받아들이는 해석의 영역을 열어둔게 아닐까. 스타크래프트 본판에다가 확장판을 깔아서. 이제 히드라로 러커도 만들 수 있게 된 개념.
본질주의처럼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해석체계에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확장해 나가는 방식은 다른 학문 사조에서도 봤었는데. 초기 커뮤니케이션 이론 중 ‘탄환이론’이라고. 매스컴을 통해 메시지를 던지면 수용자(시청자)는 해당 메시지를 총에 맞듯 박혀서 수용한다는 이론이 있었는데. 2세대로 가면서 발신자와 수신자가 상호작용한다는 피드백 개념을 추가했다. 딱 그 모양새 아닌지.
라플라스의 확정적 세계관이 양자역학으로 전복되면서 세상 모든 지식체계가 바뀌는 흐름이 왔듯. 동시대 인류가 공유하는 사고체계의 큰 조류라는게 있나 봄.
비유의 장점과 단점을 함께 만났던 토론
비유는 A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A와 비슷한 면이 있는 B를 빌려오는 건데. 비유를 하다보면 A와 B를 동일시 해버릴 때가 있다.
‘그 친구는 진짜 새처럼 가벼워’라고 했다고 ‘그 친구는 날 수 있나봐’라며 엉뚱한 비약을 하는 셈인데. 이게 토론에서는 왕왕 벌어진다. 감정의 해상도와 민감도는 그 자체로 저자가 의도하는 하나의 완결성을 가진 개념이고. 카메라의 화질이니 동영상 화질이니 하는 것들은 비유다.
A와 B의 일부 개념이 유사하다고 다른 부분이나 전체가 동일할 수는 없다. 전체가 동일하면 비유가 아니라 그냥 동어반복이겠지.
AI 도입, 왜가 중요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왜가 중요하긴 한데.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어떻게(how)만 알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기계역학을 몰라도 운전을 배우면 목적지에 갈 수 있고, 양자역학을 몰라도 반도체가 들어간 휴대폰으로 실시간 통화한다. 인류 최고 바둑기사도 알파고의 모든 수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인간은 아직 뇌나 바다나 우주의 작동원리, 즉 왜?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하지만 술취한 취객마냥 비틀거리면서도 한발자국씩 나간다.
AI 연산과정을 모두 알아야, why를 완벽히 이해한 다음에 AI를 쓸 수 있을까? 선후관계가 바뀐게 아닐까. 쓰면서 이해해 나가는 건 아닐지. 최신 과학이 인간 무지의 영역을 반 발자국씩 넓혀 나가듯.
혈액형, MBTI, 그리고 언젠간 사주
서양의 별자리, 동양의 사주, 지금 광풍인 MBTI까지. 결국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 MBTI를 통해 남편을 이해하게 됐다. 가족을 이해하게 됐다는 간증을 듣자, ‘어, 이거 완벽히 똑같은 말 들은 적이 있는데’.
사주 공부에서 자기 소개할 때 몇번이고 들었던 이야기네. 사주를 공부하고 드디어 자식을 이해하게 됐다. 남편을 이해하게 됐다. 미칠 것 같이 싫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
상대를 모른다는 것은 긴장이고, 특히 내 가까이 있는 인간을 모른다는 것은 스트레스다.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망치건 스패너건 손에 잡히는 도구를 집어 드는 것.
요즘 나를 지배하는 감정이자 내가 해석한 감정, 불안
감정도 아주 근원으로 들어가면 긍정과 부정으로 한 두 개 정도만 남는게 아닐까. 더 궁극적으로는 ‘신호’ 하나만 남지 않을지. 즉, 생존을 위해 뭔가 액션이 필요할 경우 신호가 켜지고. 그럼 그 상황과 맥락을 잘 해석해 감정을 결정하고 어떤 식이건 판단으로 이어지는 것.
늑대를 마주친다 -> 신호가 켜진다 -> 아드레날린 분비 -> 나 혼자있는 경우 빨리 튀도록 에너지 몰입 or 우리 크루랑 사냥중이었다면 돌진하는데 에너지 몰입
AI에 목숨걸고 달려드는 우리 조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라는 감정도. 결국 나의 해석으로 만들어진 감정 아닐까. AI라는 늑대를 만나 튀도록 스스로 세팅하려는 것이 아닌지. 지금은 동료 크루랑 사냥을 해야하는데 말이지.
밈과 감정 입자도, 언어의 해상도
인터넷에서 제조/유통되는 밈은 필연적으로 압축이 심하다. 1초도 아까운 스타크래프트나 롤을 할 때 길게 타자 치고 있을 수 있나. 죄다 줄이고줄이고줄여서 손실압축 프로그램을 쓴 것 처럼 풍부한 데이터는 다 날아가 버린다. 필연적이다. 빽다방이 1900원 아메리카노를 만들기 위해 풍부한 향은 날려버린 것과 같은 이치.
10년 전에는 ‘대박’, 지금은 ‘킹받는다’. 어지간한 상황에 죄다 집어넣을 수 있는 만능 키워드. 모두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닌것처럼. 어디에나 쓸수 있는 단어는 실은 의미 없는 단어 아닐까? 흰/검만 있어도 수묵화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긴 한데. 렘브란트 그림을 그리려면 좀 크레파스가 다채로워야지 않을지.
최신 뇌과학도 별 수 없다. 잘먹고 잘자고 잘싸자
그래서 뭐 뾰족한 수 없다. 당연한 걸 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