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을 예술로: 리움 미술관의 휴대용 가이드가 특별한 이유

BEP 달성 불가

여긴 도저히 입장료, 커피, 굿즈 나부랭이 팔아선 손익분기가 나올리 없다. 그런 생각이 건물 들어서자 마자 든다.

삼성가 비자금으로 조성한 예술품이 많겠지만, 관람객 입장에선 입장료보다 비싼 서비스를 얻어간다. 물론 보는 눈이 있어야 비싼 서비스가 되겠지만, 단순 원가 대비 가격으로 보면 리움 측의 압도적 적자 아닐까.

‘아니카 이’와 디지털 트윈

신작 영상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는 죽음 이후를 탐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 <공(空)>에 속하는 첫 번째 작품으로, 작가의 사후에도 작업이 계속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합니다.

이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공(空)> 소프트웨어가 자리합니다. 지난 10여 년간 아니카 이 스튜디오가
생산한 작업물을 데이터로 삼는 이 소프트웨어는 스튜디오의 ‘디지털 쌍둥이’로 기능
하며, 공동의
연구와 협업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아니카 이 스튜디오의 유기적인 작업 방식을 반영합니다.

<공(空)> 소프트웨어는 시뮬레이션과 머신 러닝을 사용하여 작가의 작품을 살아있는 가상 생물로
재해석합니다. ‘공’의 개념은 불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순수한 의식의 차원을 반영합니다. 이
소프트웨어는 3D와 5D 공간, 즉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세상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양자장을
연결합니다.

산업이 아닌 예술계에서 디지털 트윈을 만나다니. 훗날에는 너무 당연해 하나마나한 소리가 되겠지만, 전기처럼 AI도 어디에나 쓰일 것.

작품 설명에는 거창하게 적혀있지만, 심플하게 보면 본인 작업 산출물 데이터를 집어넣어 RAG로 구현했을 듯. 내가 쓴 7년치 일기를 학습시켜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 결정을 논의하는’ MyGPT와 개념은 동일하다.

‘굳빠이 이상’이라는 소설에 이상 작품에 빠져 평생 이상 연구하다 죽은 사람이 나온다. 소설 속에서 이상의 미발표 신작이 발견되고, 이걸 진짜 이상이 쓴 건지 이상 매니아가 쓴 가짜인지 이슈가 되는데. 내 생각엔 이상 매니아가 이상의 데이터를 학습한 AI bot 역할이다. 진짜 이상보다 더 이상 같은 작품을 쓰기 충분할 것. 이미 그쯤되면 이상의 아날로그 트윈이라 할 만 하다.

보는 눈이 있어야 취향이 생긴다. 취향이 없으면 모두 같은 사기 그릇이다. 숱한 사기 그릇 사이 내 눈에 조금이나마 더 띄던 작품을 갈무리해둔다.

결국 양이 질을 만든다. 시신경에 계속 때려박으면 언젠간 눈이 트이고 취향이란게 생길 것.

기타 전시회 소감

감상과 취향

서화는 실생활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자기나, 예배를 위해 만들어진 불교미술품과는 달리 오롯이 감상을 위해 만들어진 예술품이었다.

2층에는 우리나라 예술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겸재 정선(謙齋 鄭謝),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화단을 대표하는 여러 화가들의 그림과 글씨가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고서화는 중국이나 일본 그림에 비해 과장이 적고, 자연스러운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러한 작품을 감상할 때 중요한 기준은 ‘아름다움’과 ‘격조’이다.

그림의 세부 표현이 서로 잘 어울려 구도상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화면에 나타난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와 산만하지 않고 일관된 느낌을 주는지, 사물을 묘사한 선과 화면의 여백을 통해 운치 있는 세련미가 표현되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름다움과 격조가 중요하며, 구도상 균형 잡히고 산만하지 않고 일관되게’라는 걸 숙지하는 건 1차 난관이다. 저걸 텍스트로 암기만 하는게 아니라 작품에 그게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아야 보는 눈이 트인다.

근데 그 전에 암기 없이는 시작도 못한다. 결국 무식하게 해야 유식 근처에 갈 수 있는 티켓이라도 얻는다.

압도적인 고화질 디지털 이미지가 언젠간 예술 대중화에 기여할 거라던 (전)사장님 이야기가 떠오르는 순간.

이제 맨 눈으로 실물 보는 것 보다 더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지 않나? 이정도가 되면 원본 아우라는 더욱 훼손될까, 아니면 오히려 원본의 선명함을 더 쉽게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더욱 압도될까?

롤렉스니 콘스탄틴이니 하는 시계보다, 이게 어찌보면 진짜 명품 반열에 올라야 하는 시계 아닐까? 물론 저걸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설치예술. 아니 리움에서 설치한건 맞는데 예술적 의도는 아닐지도 모른다. 로봇청소기 세 대를 배치한 걸 보면 공간을 예술적으로 관리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커스터머저니 관점에서 본 리움미술관

일단 입구 찾기는 어렵다. 일부러 친절하게 만들지 않은 듯. 헷갈려서 입구 지키는 에스원 아저씨한테 물어보고 들어갔다. 근데 건물을 보면 엄청난 의도를 가지고 설계한 것 같아 그러려니 납득하게 된다.

들어가서 인포데스크까지 가는 거리가 꽤 길다. 더 인상적인건 인포데스크의 데스크 폭이 한강처럼 넓다. 질문하는 관람객과 응대하는 인포 직원 간 거리가 이렇게 먼 시설은 처음본다. 코로나 때 비말 방지 아크릴 판을 안 세워도 됐을 듯.

이것도 의도한 장치겠지. 1등 사립 미술관이라는 리움의 자부심, 관람객 너네 함부로 다가오지마, 친절하게는 하되 딱 거리 둘거야. 이런 느낌.

그리고, 리움미술관 최고 최대 설치미술은 디지털 가이드다. 갤럭시 휴대폰을 커스텀해 만든 것 같은데. 휴대폰과 골전도 이어폰 조합으로 만든 이게 여지껏 봤던 모든 가이드를 통틀어 압도적인 1위다.

내재된 콘텐츠의 충실함은 물론이고 하드웨어 구성과 실사용 유저경험 차원에서 이 이상 가이드가 있다면 내가 빨리 가서 체험하고 싶다.

아직 어색한 기계 목소리나 빠릿하지 않은 전시품 매칭, 더 다듬었으면 하는 폰트 같은 세세한 보완점은 있지만. 다른 전시관은 이거 근처라도 가는 게 있었나?

가장 아쉬운 점은 전시관 내 상주 직원의 태도 문제인데. 이들이 감시자가 아니라 안내자로 느껴질 수 있었으면 한다.

근데 입장 바꿔 보면, 어차피 가이드는 디지털 가이드가 해주고, 휴먼 역할은 설치된 작품을 훼손하지 못하게 가드 서는 역할이고. 그럼 어느정도 위압감, 위압은 아니더라도 긴장감은 줘야하는게 맞거든.

근데 또 관람객 입장에선 전시물을 보는 나를 뚫어지게 보는 가드 같은 직원을 보면 몰입이 깨지는 것도 사실이고. 차라리 나중엔 이조차도 로봇으로 대신하게 될까.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