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다리 절기
거의 언제나 사랑은 순조롭지 않다. 비-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두 성이 만나는 것 자체가 그러한 역경을 이미 예고하고 있다. 사랑에는 불협화음이 있다. 아주 현상적으로 말하면, 이는 남성의 입장과 여성의 입장 – 이는 생물학적 구분이 아니다 – 차이에서 연유할 것이다.
남성의 사랑은 벙어리이고 여성의 사랑은 이야기의 연속이라는 점, 남성의 입장은 고정성이고 여성의 입장은 방랑이라는 점은 베케트를 통해 잘 드러나는 양성의 상이한 특성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입장 차이이다. 남성의 입장은 사랑을 말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벙어리처럼 밖에 할 수 없지만, 여성의 입장은 사랑을 확인할 이야기들을 필요로 한다.
사랑은 둘의 무대
사랑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가 “둘이 등장하는 무다”라고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 강신주 박사가 다상담에서 줄기차게 이야기했던 바디우의 주장, ‘사랑은 둘의 관계’
해설 中
관계가 시간의 차원에서 논의될 때, 지속성의 문제가 사랑에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남겨진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그럼 무얼 먼저 해야 하나?
말해야 한다.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변기에 앉아서 보낸 시간보다는, 사랑한 시간이 더 많은 인생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변기에 앉은 자신의 엉덩이가 낸 소리보다는, 더 크게 …… 더 많이 “사랑해”를 외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몇 줌의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있는 자판들을 어루만지며, 나는 다시 그녀를 생각한다.
바디우가 말한, 타자에게 “선언된 사랑”이 지속성을 갖추게 될 가능성은 우선 말을 반복하는 데 있다. 즉 한 번 선언된 사랑을 다시 선언하고, 또 선언하고, 충분하다고 생각 말고 선언하고, 지겨워할 거라 염려 말고 선언하고,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라고 다짐하면서 선언하고, 사랑의 ‘ㅅ’자만 들어도 상대방이 심하게 경기를 일으킬 만큼 선언해야 한다. 말의 틀 안에서, 말을 연장하면서, 지속이나 충실성도 겸비되어야 한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끈기도 있어야 하고 충실해야 하고 말도 계속되어야만 사랑은 이루어진다? 그래서 바디우에게 사랑은 필연적으로 윤리의 문제와 결부된다.
고미숙은 사랑을 논하는 책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고 썼다. 맞는 말이다. 사랑은 점점 대상을 선택하는 일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에 실패한 것이 그 사랑의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실패한 것은 결국 사랑 고르기에 실패한 것이다. 성공한 사랑이란 잘 선택된 사랑이다. 이제 사랑을 하는 것은 할인매장에서 성능 좋고 디자인이 빼어난 텔레비전이나 에어컨을 고르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되어버린 듯하다. 사랑의 양상은 변하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은 사라지고 있다.
=> 고른 후 맞춰 가는 나날이 필요하지 않나. 홈쇼핑이나 인터넷쇼핑처럼 구매하고 택배박스 뜯으면 그걸로 설렘은 끝인가.
책 정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431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