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공학도였던 신문방송학도의 원대한 계획!

스무살 시절 국내 두개뿐인 단일 공과대학 ‘국립금오공과대학교’에 컴퓨터 공학도로서 학문에 임했던 시절이 있었지.

하하~ 학문에 임했다는 건 좀 웃기고 여튼 국내 공업대학 발전에 미약한 등록금으로나마 후원한 적이 있었지.

공대 새내기의 필수교양인 ‘미분 적분학’ 은 앞에 다섯장 정도만 고등학교 수학 실력으로(그래봤자 수능 40점이 목표였던 실력이지) 풀 수 있고 그 뒤에 나오는 3차원 미적분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디서 풀기 시작해서 어디쯤에 끝이 날지 가늠할 수가 없었으며

역시나 필수인 ‘대학 물리학’ 은 첫 시간에 배운 ‘스칼라 벡터’ 이후로는 내가 읽을 수 있는 기호가 나오질 않았다.  그 뒤로는 상형문자를 보는 듯, 알타이어의 원형 문자를 해독하는 듯… 보고도 읽을 수가 없었지

또 다시 필수과목(이렇게 다채로운 필수교양은 새내기한테서 고등학생 때를 벗기고 공학도로 만들기 위한 갱생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인 물리학 실험은… 가장 기초적인 실험도구인 ‘버니어 캘리퍼스’ 조차 처음 만져본 나였다.

지금도 인문계열 학생한테 버니어 캘리퍼스가 뭔지 물어보면 몇이나 알까?

여튼 흰 가운입고 조별로 실험하고 보고서를 작성해 내는 시간이었는데, 교수님 설명이 끝나고 애들이 실험을 시작하면 나는 강의실 밖 자판기에 가서 조원들 음료수 뽑아오고 완성된 보고서 베끼는게 전부였다.

거의 조에서는 천덕꾸러기, 묻혀가는 신세였지

오후 여섯시에 수업이 끝나는데 내가 학교에 등교하는 시각 역시 오후 6시.

학교를 다니는게 아니라 동아리를 다니는 식이었지.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내고 1.63이라는 쉽지 않은 학점을 받아들었던 스무살 여름……

…… 이래 살아선 안 되겠구나……

그리고 남부 도서관에서 80일을 매점 라면과 돈까스만 먹고 수능 공부에 얼추 매진

신문방송학도로 명찰을 바꿔 달았다.

현재 신문방송학과 스물 네번째 학생회장!

‘신문방송학도’라는 명찰 뒷면에 적힌 ‘컴퓨터공학도’ 흔적을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비록 미적분과 물리를 이해하지 못해 CPU 제조 아키텍처나 연산 알고리즘을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컴퓨터를 뜯고 포맷하고 밀가루 반죽마냥 주물럭 거리는건 익혀왔으니.

절대적인 비교는 우습지만 상대적으로, 그리고 대체적으로 공대생들에겐 문과생들의 감성적이고 유연한 사고가 아쉽고 문과생들에겐 컴퓨터나 기계를 다루는 능력이 아쉽다.

아마 자신의 분야에 특화되다 보니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난 공대생이라 문학이나 철학이나 유연이니 뭐니 이런건 잘 못해’
‘인문계열이라 컴퓨터는 잘 못 만져’

라는 식으로 자신을 한정지어 버리는게 아쉽다는 것

스무살 시절 금오공대 강의실 수업중에 이런 말을 들었다.

‘요즘은 어느 분야에서나 특출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이제 딱 한 가지만 잘하는 것으로는 특출날 수가 없는 시대다. 그렇다면 누가 최고가 될 수 있는가. 그건 바로 자신의 분야는 물론 다른 계열의 능력도 겸비하고 있는 자다’

이거 원체 예전에 들은 이야기라 정확히 옮기기가 어렵네.

해석하기에 따라 오해의 여지가 생길수도 있는데, 요는 이렇다.

내가 군대 복학하고 홈페이지 메인에 적었던 문구.

“자연대의 이성, 공대의 기술, 인문대생의 감성, 사회대생의 논리, 법대의 정의, 예대의 감각, 체대의 활력을 모두 버무린 대학생이 되자!”

여기서 그 요체를 유추하면 되겠다.

아아, 실은 이 글의 제목인 나의 원대한 계획이라 함은…

신문방송학과가 손수 제작한 영상과 사진, 음악 파일등을 연중무휴 감상할 수 있게 하는 미디어 서버를 만드는 것!

전에도 95학번 이준엽 선배님이 만드신 서버가 있었지만 이미 세월이 흘러흘러 늙고 병들어 세대교체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지

어제 오늘 컴퓨터를 하루종일 붙잡고 있으니 스무살 컴퓨터 공학도 시절이 생각나서 긁적여 봤다.

추후엔 신방과 학생을 위한 무제한 용량의 웹 하드 서버를 구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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