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다 만 신 2. 믿음에서 출발한 앎, 앎에서 출발한 믿음

꼬리글이 길게 이어지면 보기 불편할 것 같아 답글로 이어쓴다.

먼저, 성경 해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처음 한 사람이 스피노자란 건 처음 알았다. 책을 읽어보고는 싶은데 왠지 엄청 어렵고 딱딱할 것 같다는 느낌이 파팍~ 오는구나.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란 비교적 최근의 책도 기존 성경 해석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거든. 빌려놓고 한 번 훑어보긴 했는데. 이런, 지금은 딱히 기억에 남는게 없네.

다음은 기독교가 과학에 어느 정도 자리를 양보하는 문제인데.
이건 정치학이 쓰임에 따라 행정학이나 경영학한테 자리를 양보하는 거랑은 정도가 다르다고 보거든. 한마디로 기독교가 포기해야 할 파이가 너무 큰거야. 물론 신약의 기적씬을 편집하고도 충분히 의미 전달이 가능해도 기존 관객들은 영 맥이 빠지는 거지. 헐리우드 액션 영화가 프랑스 예술영화 돼버린 느낌? 태초에 빛이 있으라는 이 멋진 한마디를 못 내뱉는거야. 너무 큰 제약 아니겠어? 창조론을 양보하기 시작하면 그 뒤에 양보해야 할 것들이 도미노처럼 기다리고 있을 걸.

신학과 철학의 차이가 무얼까?
신학에는 절대자, 절대성이 있어야 해(물론 내가 내린 정의임). 그 절대자가 있다고 믿고 그 분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지. 반대로 철학은 있을지 모르는 절대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잖아. 순서가 반대인거지. 믿음에서 출발한 앎과 앎에서 출발한 믿음. 기독교가 창조론을 버리고 뒤이어 도미노를 눈물 머금고 무너뜨린다면 신학은 철학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봐. 그래야 앞으로 쏟아질 폭우같은 비판에 쓰러지지 않고 발전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종교에 가변성을 인정해서 시대에 따른 적절한 해석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
가변성을 인정하는 순간 그게 종교일까? 불변성은 종교가 갖춰야 할 절대성의 전제조건 아닐까? 고고학 성과에 따라 교리가 바뀌면 그건 이미 신학이 아닌 고고학이지 않나? 시대 변화에 맞게 해석하는데 선두주자는 유교지(이건 애초에 종교가 아니지만). 아예 정규교육 과정에서 그렇게 배우잖아. 온고지신이니 해서 忠을 현대에는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식으로. 예수를 신이 아닌 2000년 전에 존재했던 철학자나 사상가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게 상정한다면 충분히 가변성을 발휘할 수 있지.
이건 좀 더 현실적인 문제인데. 교리의 변화를 인정해 버리면 기존 교단이 가지고 있는 권위의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거든. 종교개혁으로 결국 지금은 거대한 개신교라는 새로운 종파가 생긴거잖아. 지금의 종교 기득권자들이 과연 그런 유연한 해석을 하겠냐는 거지. 그 반대로 이단사냥에 나갈 확률이 더 높지.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콩도르세 아저씨의 이 말을 요즘들어 자주 써먹는데, 이 말을 그대로 대입했을때 신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얼마나 목적에 부합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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