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T를 대하는 사무직 로동자의 자세

23년 4월 15일, AI 스터디 모임 후기를 옮겨 적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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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모임의 주요 질문이었던 ‘개인적으로 GPT를 활용하는 사례’에 대해 제 생각을 좀 더 정리해봤습니다.

1.
엑셀을 업무용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쓸 수 있는 것과 동일하게, GPT도 업무와 개인 목적 양쪽으로 다 쓸 수 있다고 봐요.

제 취미는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있는데. 하나는 11년 동안 한 살사댄스. 두번째는 5년 동안 한 역도. 세번째는 4년 동안 하다 말다 한 명리학(사주팔자풀이). 이 소재로 GPT와 대화해봤는데. 가장 큰 도움은 살사댄스에서 받았습니다.

살사는 댄스스포츠나 발레와 달리 학술적인 체계 정립이 부족하고, 특히 한국에는 이론적인 문서를 찾기 몹시 어렵습니다. 해외 텍스트를 많이 습득했을 GPT다 보니 상당히 풍부하게 살사의 개념을 이야기 해주더군요.

살사를 주제로 여러 이야길 나눠보면, 얘가 정말 살사댄스의 개념, 본질, 원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습니다. 한 예로, “살사는 고수일수록 무게중심을 낮추고 마치 땅에 발을 뿌리 박은 듯 움직이는데, 왜 발레리나는 몸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추는 걸까. 둘 다 각 분야의 고수인데 서로 정반대 움직임을 보이는 이유”를 물어봤는데. GPT는 아래와 같은 답변을 줬습니다. 명쾌합니다. 바로 납득이 되었습니다.

“살사는 빠르게 걷는 장르의 춤이므로 무게 중심을 낮게 가져가는게 유리하다. 무게 중심을 지면에 가깝게 유지함으로써 골반을 더 유연하게 쓸 수 있고, 스텝의 안정성은 높아지고 제어하기는 쉬워진다.
반면, 발레는 점프 동작이 많고 우아하고 가벼워 보이는 인상을 주는 게 필요하기 때문에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총총 걸음을 연상케 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 외에도 살사가 짝춤이기 때문에 가진 핵심 요소인 텐션과 커넥션. 그리고 사교춤으로서 갖춰야할 특성인 파트너에 대한 예의 등을 이야기하는데. 진짜 살사댄스 대부가 말해주는 느낌입니다.

다음, 역도의 경우 나의 체중과 기록, 경력을 넣고 운동 프로그램을 짜달라고 하거나. 어떤 부분을 고쳐야하는지 질문을 했는데. 아마추어 동호인 수준인 제가 도움을 받기에는 전혀 손색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주는 살사보다 영문 텍스트가 없어서인지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사주의 개념에 대한 이해는 하는데. 사주 용어를 다르게 정의하고 있어서 도저히 활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명리학은 경제학처럼 각 학파마다 주장이 다른데, GPT가 학습한 명리 자료가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명리 서적은 아니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중국 서적이 아닐까 합니다.

전반적으로 내가 식견이 있는 분야일수록 큰 도움을 받는다는 인상이었습니다. 그 분야에 대한 깊이가 있을 수록 더 깊은 질문과 후속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GPT로 특별한 도움을 못 받으면, 그게 GPT 한계가 아니라, ‘아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구나. GPT를 더 끌어낼 이 분야 내공이 내겐 없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2.
요즘 저는 AI를 대할 때, 이런 상황에 계속 대입해 봅니다.

내가 택배운수업 종사자라고 상상합니다. 현실의 내 일이 아니고, 이미 지나간 일이라면 쉽게 냉정하고 올바른 판단을 해낸다고 보니.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건데요.

자, 나는 리어카를 끌고 집집마다 화물을 배달하는 택배일을 하고 있습니다. 튼튼한 두 다리, 엄청난 폐활량과 근면성실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매일 같이 기름칠하는 리어카는 저의 분신이자 제 자아의 확장입니다. 어떤 리어카보다 제 리어카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럽니다. 1톤 포터라는 이름의 트럭이란 물건이 나왔다고요. 비싼 기름을 넣어야 움직이고 운전면허라는 불필요한 시험도 봐야하고, 심지어 리어카보다 한 50배는 더 비싸다고요. 대신 뭐 한번에 더 많은 물건을 싣고 좀 빨리 움직일 수는 있다고 하네요.

근데 저건 리어카 시대 짐꾼의 사고방식이죠? 현대를 사는 나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죠?

자,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유전적으로 타고난 다리. 심폐지구력. 근면성실. 화주와의 끈끈한 관계. 뭐 백마디 천마디 말을 갖다 붙여도 소용없습니다.

택배사업을 계속 할거라면, 내 분신 같은 리어카를 놓고 운전면허 따러 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민속 박물관에서 짐꾼 코스프레로 일할 거 아니면 선택지는 하나입니다.

택배를 기다리는 고객은 제가 리어카로 피 땀 눈물 흘려 운반했는지, 에어컨 나오는 1톤 포터로 실어 왔는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냥 옥천허브 들어가 안 나오면 짜증날 뿐입니다. 제시간에 오는걸 원할 뿐입니다.

남의 일은 쉽게 보입니다. 그래서 계속 제 3자에 대입해 봅니다. 알파고와 이세돌 대결 전날까지도 여론과 전문가들은 압도적으로 이세돌이 이긴다고 했습니다. 바둑판에서 벌어지는 경우의 수는 우주의 별만큼 많아서, 컴퓨터 연산으로는 안 된다며. 인간이 이긴다는 경우의 수를 별처럼 늘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주장들은 어떻게 됐나요? 사건의 지평선 어딘가로 사라졌을 겁니다.

3.
모임에서 자기소개할 때 말씀드렸듯, 평생을 근거 없는 기술낙관주의자로 살아왔던 저인데. 처음으로 기술이 두렵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양가 감정이죠. 소비자로서 편익이 커질 거라는 데에 확신이 드는 만큼, 생산자로서 어떻게 가치를 계속 생산해 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지금은 택배비가 3천원쯤 하죠. 만약 제 리어카 택배를 고객이 이용하려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택배 하나에 얼마를 지불해야 할까요? 적어도 100배 가격인 30만원쯤은 줘야 할 겁니다.

1톤 포터가 도입되면서 소비자 입장에선 택배비가 100분의 1로 줄었습니다. 이제 AI가 도입되고 로봇자동화가 되면, 택배비는 300원으로 10분의 1로 줄고, 택배 받는데 걸리는 시간은 24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지 않을까요? 리어카 택배 대비 100배 곱하기 100배의 편익입니다.

다만, 리어카를 놓고 운전면허를 등록한 택배원이. AI 택배 시대에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할지. 그 고민이 깊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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