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운가? 서른

<strong>설운 서른</strong>책 제목 : 설운 서른
저자 : 기형도|김종길|김행숙|안도현|장석주|천양희|딜런 토마스
정가 : 8000원 (할인가 : 4000원)
출판사 : 버티고
출간일 : 2008. 05. 21

스물, 서른, 마흔, 쉰…

연속적인 시간을 달력이니 시계니 이런 걸로 분절시켜 살아가다 보니, 10년에 한번씩 자기 나이테 앞자리가 바뀌는 시기가 온다.

그리고 도착한 서른…

서른은 서러운 나이일까?

명명백백히 신체적으로 정점에 다다랐던 이십대가 포물선을 그리며 서서히 하강하는 시기.

‘설운 서른’ 이라는 시집의 표지에는 이리 적혀있다.

‘흘러가다 잠시 멈추는 시간, 서른’

젠장, 책의 표지는 또 얼마나 괴기스럽게 팍팍한 모양새인가.

망할, 출판사 이름은 또 ‘버티고’ 란다.

서른 즈음을 타령한 시들을 모아 놓았다.

‘서른이라는 시간의 웅덩이에 띄워 보내는 시들’을 만나보자.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하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먹기 싫은 심정에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같은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 사직서 쓰는 아침, 전윤호

요즘처럼 대학 졸업이 늦고 취업난 때문에 회사 생활이 늦어지는 게 보통인 시절.

서른은 아직 와이셔츠에 첫출근의 빳빳함이 남아있는 나이 아닌가.

다만, 화창한 봄날 일신상의 변덕인지 일탈인지 탈출인지를 꿈꿀 수는 있는 나이.

다만, 카드 값과 월세, 전세자금 대출에 길들여지는 나이

이번에는 전혀 다른 서른의 모습이다.

아니, 이 사람에게 서른은 출근하는 날의 하루일 뿐이다.

출근길에 올라타는 지하철의 한 칸일 뿐이다.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장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손익관리대장경損益管理臺帳經과 자금수지심경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장좌불립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사무원, 김기택

소개한 시와 별 관계없이 떠오르는 단상

서른은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

고로, 앞으로 늙어갈 것인가 젊어질 것인가 선택할 수 있는 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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