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술 낙관주의자 임을 먼저 밝혀야겠다.
그러니 작가 논조에 기본적으로 비판적인데, 그렇다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2만원 주고 300쪽짜리 책을 읽는 내내 화 내면서 볼 필요는 없으니.
334쪽까지 다 읽고 뭔 생각이 들었냐면. ‘밥 먹으면 배부르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탈 난다. 적당히 먹어야 할 것이다.’ 따위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써 놨나 싶다.
어느 기술 지상주의자도 사례로 나오는 ‘게임하다 애 밥 굶겨 죽이는 가정’을 유토피아로 생각지 않는다.
편집증적으로 보일만큼 기술에 의한 부정적 사례만 모아 만들었다는 인상을 주는 건, 이 많은 사례를 하나로 꿰는 통찰도 논리도 데이터도 부족하기 때문 아닐까.
일상적인 디지털 도구조차도 인간의 기량을 조금씩 깎아 먹는다.
GPS는 종이 지도나 육분의 같은 도구보다 정확하지만, 사용자를 조종사가 아닌 방관자로 만든다. 우리의 위치는 GPS 지도의 중 심에 있지만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캘리포니아의 외딴 지역에서 GPS가 꺼진 적이 있었다. 아들과 나는 낡은 지도를 보고 기억하고 있는 표지판들을 꿰 맞추면서 길을 찾아야 했다.
살짝 겁이 나기는 했지만(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 확실치가 않았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고속도로에 이르는 시골길을 찾아냈을 때는 보람을 느꼈다.
과연 나도 편집증적으로 책에서 별로인 예시만 뽑아냈을까? 내가 보기엔 300쪽 짜리 책 전반이 이정도 수준의 고만고만한 이야기로 채워져있다. 그냥 점잖은 클리앙 아재가 쓴 글 모음집 느낌.
기술로 인해 많은 인간적 경험을 빼앗기는 중이고 그런식으로 너무 가면 위험하다는 큰 틀의 논조와 책에 나오는 개별 사례와 저자 주장에는 내가 또 다 긍정하는 것도 웃긴다.
비유하자면 ‘자동차라는 이동 기술로 인한 부작용, 비만 같은 걸 경계해야 한다. 가끔 걷거나 달리면 좋으니까 종종 그러자’는 수준의 이야기니 뭐 딱히 무슨 반발심이 들까.
역설적으로, 그러니까 얻어갈 수 있는 새로운 게 뭐지? 싶은 책이다.
아니, 다시 들쳐보니 효용이 있다! 손글씨를 조금 더 자주 쓰자고 결심한 것. 분명 종이와 연필로 끄적이는 게 어떤 사건의 초기 정리와 확장에 도움이 되는 건 경험적으로 분명한데. 이걸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저자는 들어가는 말 말미에 이렇게 쓰고 있다. “경험의 소멸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다.”
나는 책을 덮으며 이렇게 답한다. “경험은 소멸되는 중이 아니라 그 습득 방식이 변해가는 것 뿐이다. 그것이 (아마)진보다.”
진보라는게 반드시 옳거나 선하다는 확신은 없다.
별점 1개 준다.

– 좋은 책, 죄악인 책
‘좋은 노래는 가슴아프고 좋은 책은 불편하다’는 말을 김규항 씨 블로그에서 본 후. 내게도 좋은 노래와 책의 기준이 됐다. 이 책 반응이 왜 이리 별로였을까. 불편한 게 아니라 지루하게 만든 죄 아닐까.
대개 책 추천사라는게 뻔하다, 레거시로 불리는 공중파 방송 수위도 뻔하다. 다수의 심기를 거스리지 않으려다보니. 밥 먹으면 배부르다 수준의 뻔한 소리의 나열이기 십상인 것.
요즘엔 지루한 큰텐츠는 죄다. 웃겨야한다는게 아니라, 어떤 형태로건 자극을 줄 수 잇어야 한다. 차라리 ‘직접 오두막 짓고 살아본 썰 푼다’ 윌든이 오래 회자되는 이유일 것.
좋은생각 8월호 특집 4쪽으로 실리면 될 글이 너무 길어졌다. 334쪽으로.
– ‘GPS 없이 길을 찾는다’는 식의 예시들도 애매하다.
저자가 말하는 ‘좋은 직접 경험’과 기술을 매개로 한 ‘별로인 간접 경험’의 기준점이 뭔가. 정확한 임계점을 말하기 어렵다면 얼추 그 범주라도 제시해야할텐데.
미디어라는 단어 자체가 매체/매개체라는 뜻인데. 인간은 애초에 도구를 쓰는 동물이라 어떤 경험이건 매개체를 안 쓰는 경우가 드물다.
GPS 안 쓰고 운전한다치자. 그럼 자동차는 뭔가?
미디어학자 맥루한 아저씨 말을 빌리면 자동차는 인간 다리의 연장이다. 즉 다리와 지면을 매개하고 있는 것. 왜 오롯이 지면을 느끼지 않고 자동차라는 미디어를 이용하는가.
자동차를 안 타고 걸어서 길을 오롯이 만끽한다고 해 보자. 왜 인위적인 운동화라는 걸 신고 가는가. 운동화도 인간 발의 연장이다. 매개를 빼고 순수하게 자연과 맞닿아야지.
이런 식으로 직접경험 근본주의까지 가다보면, 역설적으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폭이 급격히 줄어든다.
맨발로 얼만큼 갈 수 있을까. 동네 편의점 정도?
– 재택과 화상미팅으로 충분하냐
이 질문을 좀 더 풀어쓰면, ‘재택근무와 화상미팅 만으로 그 조직이 시장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냐’가 된다.
기업가는 자선가가 아니고 직장인도 자봉단이 아니다. 조직 경쟁력(그리고 나의 경쟁력)에 도움 되면 ‘구글은 이렇게 한다더라’는 구글병처럼 앞다퉈 도입할테고. 그 반대면 한때의 거품으로 사라질 것.
현실 세계에선 전부와 전무가 아닌 적절한 그 어디쯤에서 조합되겠지. 재택이 경쟁력을 만들어주는 조직이나 직무, 상황이 있을 것.
한가지 확실한 건, 한 공간에 모여 공동의 목표를 향하는 직장생활이 주는 ‘동물적인 무리생활’ 강점이 당장 사라지긴 어려울 거라는 것.
예를 들어, 내 전재산을 털어 1년짜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함께할 동료 한 명을 뽑아야한다. 재택하겠다는 동료와 야전침대 놓고 사무실에서 자겠다는 동료.
누구랑 일할건가?
– 콜포비아는 소통을 거부하는 세태와 세대에서 나온게 아니다. 인간 본연의 불편함을 피하려는 속성이 낳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30분 내에 배달해주는 배민, 내일 아침 갖다주는 쿠팡. 빨래와 청소 기타 등등 잡일까지 처리해주는 대행서비스. 이 모든게 노년층에게는 ‘직접하면되지 뭘 그런것까지 돈주고 시키냐’에 속하는 서비스들.
노년층도 코로나를 계기로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장바구니 들고 장 보는 것보다 폰으로 톡톡하는게 훨씬 편한 걸 알고 이제 돌아갈 수 없다.
콜포비아에서 포비아라는 네이밍이 주는 폭력성 때문에 약간 현상이 과장된 것 같은데. 전화 벨소리를 정말 공습경보처럼 여기며 벌벌떠는 사람은 없다.
배민에서 시키면 되는데 왜 굳이 전단지 찾아 전화까지 거냐는 불편함에 대한 짜증 쪽에 좀 더 가깝지 않을까. 통화시 갖춰야하는 ‘매너’가 주는 긴장감. 거기서 오는 불편함.
MZ건 잘파건 알파건 그 어떤 세대건 결국 진화 차원에선 거기서 거기인 인간이다. 그 시대의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발현될 뿐.
– SNS/온라인 게임 제한, 긴급 처방이자 대증요법
‘건강하고 싶으면 건강해라’는 말장난 같은 헬스 유튜브 썸네일을 보고 클릭했는데.
요즘 연구결과 방향성이, 유산균 먹고 무슨 보충제 먹고 이러는게 아니라. 적절한 식습관과 수면을 통해 건강해지면 체내 유산균도 결과적으로 적절히 생성 유지되고 한다는 것.
즉, 유산균이 부족하니 유산균 보충제를 먹는게 대증요법 수준이라면 본질적으로는 건강한 생활로 돌아가 건강한 몸이 되어야 하는거다. 어찌보면 너무 뻔한데 반박할 수가 없는 소리.
SNS와 게임에 무거운 죄를 지우고 족쇄 채우는게 사회 차원에서는 가장 손쉬운 처방아닐까. 그런데 대증요법에 그칠수밖에 없는.
나 역시 SNS와 숏츠에 빠져있다면, SNS 어플을 지울게 아니라 지금 내 일상이 뭔가 공허하지 않은지 돌아 봐야겠지.
숏츠는 공허한 틈을 놀랍게도 잘 채워 나가는 점액질 같은 것일 뿐.
– 결국은 ‘자유의지’에 대한 물음
개개인이 의식적으로 간접경험 대신 직접경험을 취하라는 주장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걸 전제한다. 아니 전제는 당연하고 강조한다.
근데 자유의지를 너무 강조하다 ‘우울증’이 코로나처럼 유행하게 된 건 아닐까. 인간의 의지가 우주만큼 위대하다는, 인류의 빅뱅급 자의식 팽창.
삐걱대는 세상의 작은 나사로, 거대한 톱니바퀴의 단단한 톱니 하나로. 그렇게 구조의 작은 한 조각으로 살아가는게 답일지도.
(본 소감은 GPT5의 검토를 거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