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원’, 행복은 목적인가 수단인가

기존에 내가 가졌던 ‘행복’이란 개념에 대한 생각의 파편이 쫙 맞춰지는 쾌감이 있다. 간만에 만난 좋은 책.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한 ‘수단’

목적과 수단의 전복.

이거 이런저런 우화에서 엄청 자주 보는 현상이다. 분명 무언가를 하기 위해 돈을 버는 걸텐데. 어느새 그 무언가는 사라지고 수단인 돈 자체가 목적이 된 상황.

개인이 행복을 행위의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삶의 지향점으로 삼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행복은 감정의 상태일 뿐이고, 이 책에서 말하는 생리적 쾌감이 주가 되는 행복 상태는 지속 기간이 짧다.

그 찰나의 행복을 계속 이어가는게 삶의 목적이라면 도박중독 게임중독 같은 도파민이 끊임없이 나오는 걸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하지 않나?

애초에 인간 삶의 목적이 뭔가. 종 단위에서는 종 자체의 생존. 이를 위한 개체 단위의 번식 만이 있을 뿐인데.

개인 관점에서는 종이니 진화론이니 알게 뭔가. 결국 개인 단위의 삶의 의미는 개인이 세우는 거다. 원래 대자연에서 초기화 상태로 출하하는 거라 세팅은 하기 나름이다.

출하시 기본적으로 깔아 놓은 OS에 생존과 번식을 위한 기본 가이드가 탑재되어 있을 뿐.

쾌락적응

로또 당첨 같은 대박 사건도, 그 반대인 대박 충격도 평균 유효 기간은 석 달.

아무리 맛난 음식도 딱 한끼일 뿐. 영양소가 다 소화됐는데 계속 만족하면 굶어죽으니 쾌락이 지속되지 않는 게 진화론 차원에선 당연.

강남 84제곱미터 신축 아파트를 사도, 포르쉐 911에 올라타도. 구매와 소유에 대한 흥분과 만족은 평균 석 달이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산지 10년 돼도 너무 설레면 조증 같은 병리적 문제를 의심해야 하는 게 아닐까.

무엇을 구매하느냐보다 그 물건이나 경험에 타인이 어느 정도 개입되냐가 행복을 좌우한다. 똑같은 포르쉐라도 혼자 타는 것과 누구와 함께 드라이빙 가는 것의 만족도 차는 크다.

심지어 동승석에 함께 타는 게 강아지라도, 아니 사람 닮은 인형이라도 태우는 게 아마 만족도를 높이는데 일조할 것.

행복의 가장 큰 결정 변인이 유전.

(내 생각보다 더 크게)사회성과 행복의 상관관계가 크다, 행복조차 타고난 기질의 작용이 커서 전체 변수의 절반쯤을 차지한다.

특히 기질 중 외향성과 상관관계가 큰데. 결국 사람과 상호작용이 충만할수록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게 타인(동료/이성)이었기 때문. 생존과 번식을 위해 음식 만큼이나 음식을 함께 만들고 서로를 구해주는 동료가 절실히 필요했다.

결국 혼자는 한계가 있다.

내향은 외향의 반대가 아니다. 외향성의 정도가 낮을 뿐이지 그 반대편인 마이너스는 아닌 것. 즉 혼자 있는 것이 좋다가 아니라. 사람도 좋지만 혼자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에 가깝지 않을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

이런 사회과학서도 스포일러라는 게 있을 수 있나 싶지만. 이 책 스포일러에 해당하는 결론 한 문장.

인간이 존재하는 진화론적 목적은 종의 생존(그리고 이를 위한 번식)이다.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음식과 사람. 이 두 가지가 함께 있다.

마치 남주와 여주의 재회로 끝나는 엔딩 같지 않나?


여기서 약간의 밸런스 패치.

진화론에 너무 몰입하다 보면 모든 행위가 생존/번식/랜덤으로 귀결된다. ‘망치를 든 사람 눈에는 못 밖에 안 보인다’는 격언처럼 모든 세상사를 진화론으로 환원하게 되는 것.

교양 과학서를 보면 ‘우주의 규모를 떠올려보면 인간은 바닷가 모래알보다 작은 존재’라는 식의 표현이 있는데.

모래알이고 나발이고 그래서 지금 당장 현생의 출근이나 빨래, 공과금 납부를 안 하고 살 수 있냐고. 아무리 모래라도 현실에 발 붙이고 사는 생활인이라면 공과금 내며 살아야 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예비 번식용 유전자 컨베이어 벨트에 불과한 몸뚱아리지만, 나름의 취미생활도 하고 다음 일자리도 걱정하며 지내야 한다.

그게 600만년 인간 진화 최첨단에 선 한 개인의 역할이라면 역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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