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라는 이름의 굴레

학생회장 시절, “선장의 편지” 라는 이름으로 학과원들이 함께 생각해 볼 만한 문제에 대한 글을 썼는데 생각보다 몇 편 못 쓰고 중단됐었다.

이건 4편.

졸업전에 마무리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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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이 일간지 인터뷰에서 ‘날 진보라 부를때 좌절한다’고 했는데,
저는 후배들이 절 ‘이상주의자’라 부를 때 좌절합니다.

신해철 자신은 그냥 ‘원칙론자’인데,
개념 상으론 보수라 칭하는게 더 어울리는 자신을 진보라 부르는 사회에 절망한다는 거죠.

저도 이와 비슷한 두 가지 이유로 후배들의 이상주의자 명명에 좌절합니다.

첫째, 제가 그리는 사회가 후배들에겐 실현 불가능한 공상 수준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입니다.

전 맑스 아저씨처럼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의해 분배’ 하자는 사람도 아니고
‘꽃으로도 때리지 않는 폭력 전무한 사회 실현’을 외치지도 않거든요.

개인의 문제보다 구조의 문제를 먼저 말하고, 경쟁보다 복지나 완충장치를 먼저 꺼내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후배들에겐 너무 먼 이야기로 들리는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한일 감정 같은 거리감을 어찌 좁혀야 할지

둘째, 이러면 진짜 이상주의자에게 미안하거든요.

제가 이상주의자라면 세상엔 극이상주의, 초초초 이상주의자로 명명해야 할 사람이 대거 등장할 겁니다.

그들을 위해서도 전 마지노선으로 존재해야 해요.

‘세상은 원래…’ 라는 후배들에게

‘이상주의자’가 가드 불능 필살기라면 ‘원래’는 무한반복 필살기입니다.

누군가 ‘이.상.주.의.자’란 5글자로 규정하면 해명을 위해 전 500자쯤 떠들어야 하거든요.

‘원래’라는 만능 키워드는 한 번 발동되면 무한회귀로 이어져 세상 만사의 근원적 답변이 돼 버립니다.

‘인생 첫째 가치는 돈이 아니다, 기업의 존재이유는 이윤추구가 아니다’ 등의 제 주장에 대처하는 몇몇 후배의 반응은 아래와 같습니다.

“선배, 세상이 원래 그래요”
“네, 뭐 선배 같은 사람도 있어야…
“선배가 아직 세상을 모르셔서”

억울해!

세상물정이란게 인생의 쓰달시매(쓰고달고시고매운) 한 일을 고루 맛볼때 알게되는 거라면,
자기 땀과 맞바꾼 밥을 먹어볼 때 데구르르 굴러오는 거라 한다면 상당히 억울합니다.

‘땀 흘려 얻은 밥’를 낱말 그대로 해석하면 누구 못지 않게 할 말이 많거든요.

놀이동산 장난감 가판에서 폭설로 무너진 비닐하우스 재건까지 20살 이후로 해 본 일들이 줄 잡아 15개쯤 떠오릅니다.

누구는 막장 인생들의 종착역이라 하고, 혹은 좀 더 쳐줘서 하류인생의 전환점이라 혹평하는 건설현장 일이라면 누구보다 오래 했을 겁니다.

탈진을 막기위해 정제된 나트륨 알약을 먹고 들어가는 유리 용광로 작업.

용광로가 꺼지면 40도 켜지면 90도를 넘는 공장에서 작업을 마치면 검은 작업복에 소금기로 하얀 지도가 그려지곤 했죠.

학기중엔 책을 넘기고 펜을 굴리던 손으로 방학땐 철골을 올리고 드릴을 굴렸으니,
제게 밥 한끼 커피 한 모금이라도 대접받은 이는 제 땀의 빚에서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그곳 현장에서 세상물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난파된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요.

홍수로 재고가 모두 물에 젖은 제지공장 사장,
역시 홍수로 차량이 모두 침몰된 운전학원 사장,
주식투자로 떵떵거리며 살다 억대 빚을 지고 도망다니던 형,
허리를 다친 특전사 출신 형,
고아원 선후배들로 이뤄진 고속도로 조경 팀……

분해!

유치하게 세상물정에 그리 까막눈 아니라고 주절주절 늘어 놔 보지만,

당신들에게 ‘원래’를 가르쳐 준 사람은, 아마 나보다 연륜있고 땀도 더 많이 흘렸을테죠.

무엇보다 저보다 먼저 당신을 만나 냉큼 ‘원래’라는 굴레를 씌웠으니 그저 분할 뿐입니다.

동해의 모래사장, 서해의 진흙뻘을 쏘다닐 새도 안 주고 원래라는 말뚝이 허하는 범위 안에서만 서성이도록.

이상주의자 선언

당신과 내게 주어진 ‘원래’라는 이름의 ‘굴레’를 부수기 위해 내게 좌절을 주던 ‘이상주의자’란 말을 집어들기로 합니다.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다윗이 꺼내 든 것이 큰 칼이 아니라 조그만 차돌이었듯,
거대한 누가 만든 굴래를 부수기 위해 모난 ‘이상주의자’란 돌을 품에 넣기로 합니다.

하지만, 제가 품기로 한 이상주의는 날카로운 현실의 작두 위를 걷는 긴장된 걸음걸음 입니다.

제가 취한 이상주의의 반대말은 현실주의가 아니라 패배주의 입니다.

작두를 통과할 배짱이 없어 말뚝에 매여 낮잠 자는 패배주의 말입니다.

골리앗도 다윗의 차돌 한 방에 무너졌고,
거대한 댐도 조그만 구멍때문에 허물어집니다.

“원래는 왜 원래인데?”
라는 이상주의자 선배의 세상물정 모르는 돌팔매질이 당신 굴레를 ‘딱’하고 맞힐, 그 순간 오겠지요!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 콩도르세 (1743-1794, 프랑스 철학자)

제 공부가 부족해 아직 위의 말을 비판하고 개선할 방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1 thought on “원래라는 이름의 굴레”

  1. 글 잘 읽었습니당 ㅋㅋㅋ

    음…
    사실 저도 그래요 선배.
    저도 사실은 좀 갈등론에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거든요.

    이 글을 읽다보니
    저도 항상 ‘세상은 원래’라는 생각을 해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요 선배

    사람들이 ‘세상은 원래’라고 말하는 이면에는
    이상적인 세상, 살기 좋은 세상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나 기대가 자리하는 것 같아요

    적어도 전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정말로 본질적이고 당연한 소망이 부끄러운 걸까요.
    아님 그 기대에 따르는 실망이 두려운 걸까요
    모두들 ‘세상은 원래’라는 포장지로 그 소망을 가리려 애쓰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쩌면
    세상 대부분 사람들은
    숨겨진 이상론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전…
    선배가 너무 절망(?)하지 않으심 좋겠어요ㅋㅋ
    그리고
    선배가 오래오래 마지노선으로 남아주셨음 합니다ㅋㅋ
    그래야 저도 그 한켠으로 따라갈 수 있으니까요ㅋㅋ

    주절주절 무지하기 이를 데 없는 댓글이네요 ㅋㅋ
    전 아직 선배만큼 깊은 생각을 하려면 한참 멀었나봐요 ㅋㅋ
    그냥 글 읽고 떠오른 생각을 적은거니까 허술하더라도 귀엽게 봐주세요ㅋㅋ
    게으르게 놀고 있는 저에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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