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미술 안내서’_그나마 친절한 대중 현대 미술서

“예술가가 하는 일이란 새로운 클리셰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소비하는 문화에 관해 말하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를 자기도 모르게 은근히 드러내는 행위일 때가 많다. 우리가 즐기는 것에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가 반영되는 것이다.

나는 현재 나의 음악 취향을 친구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그러니까 “너 이건 꼭 들어 봐야 해.” 하고 말하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이면 늘 움찔한다.

친구는 의무감에 그 음악을 듣게 되고 나는 내 영혼 자체가 거부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무언가를 칭송하는 것보다는 혹평하는 것이 언제나 더 안전하다.

우리의 미적 선택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염려하는 것은 모더니즘의 DNA에 포함된 자의식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문화 콘텐츠를 추천하는 것도, 추천받는 것도 실은 대단한 일이다. 대단히 피곤할 수도 놀라울 수도 있는.

예술가에게는 동료들의 압박에 저항하는 능력,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는 능력이 필수적이지만,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외로움과 불안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런 불확실성의 당혹스러운 순간들이 헛소리 생성기가 치고 들어오는 때이다.

이것은 인지 과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가 모르는 것,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인간 정신의 부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가?’처럼 명확한 답을 내기 어려운 흐물흐물한 문제에 직면할 때면 우리의 정신은 그 불편함을 감추려고 헛소리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아름다움의 주관적 본성이 이렇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다 보니 사람들은 미적 만족을 준다고 느끼는 대상에 대해 더욱 경험적인 설명을 찾게 된다. 나는 이게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 나는 철학자 존 그레이John Gray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과학 이론이었다면 오래전에 논파되고 폐기되었을 것이다.”

모르는 것, 불완전한 것을 가만 놔두질 못하는게 인간이다. 어느 쪽으로건 지레짐작하고 판단해서 행동을 취해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 저녁 무렵 저 멀리 희끄무레한게 보이면 늑대인지 아닌지 빨리 판단해서 도망갈지 동료를 불러 사냥할지 판단해야 했다.

다만, 현대 사회에선 대개 불완전한 정보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이득 될 확률이 높다. 보통 투자 세계가 그렇더라.

내가 좋아하는 인용문 중에, 어떤 예술가의 작품이 뉴욕 아파트들의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지 않는 것 기라면 그 사람은 결코 예술가로서 좋은 경력을 이어 가지 못 할 거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도 상업 갤러리들이 전시회를 열고 작품들의 값을 매길 때는 대개 작품의 질이 아니라 크기를 기준으로 한다. 큰 그림이 작은 그림보다 더 비싸다.

나는 여기에 적용된 논리가 아주 희한하다고 생각한다. 더 큰 그림이 더 좋은 그림인 것은 아니며, 내 경험상 어떤 예술가의 가장 큰 작품이 그의 가장 좋은 작품인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2차 시장인 경매에서는 그 모든 진실이 드러나 아무리 작은 그림이라 해도 좋은 그림이 언제나 가장 비싼 값에 팔린다.

예술의 질을 결정하는 척도 가운데는 아주 황당한 것도 있다. 소더비에서 일하는 필립 후크의 말에 따르면 항상 빨간 그림들이 가장 잘 팔리고 그 뒤를 이어 흰 그림, 파란 그림, 노란 그림, 초록 그림, 검은 그림 순서로 팔린다고 한다.

물론 오래된 빨간 그림이라는 점만으로 가장 비싼 그림이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어떤 미술 작품이 소더비의 경매대에 올랐다 는 건 그 예술가가 이미 가치를 입증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예술품 가격을 원가에 적정 마진을 붙여 판매한다 그러면 세상 물정 모른다는 소릴 듣겠지만, 또 묘하게도 갤러리에선 큰 작품일수록 비싸게 사간단다. 그럼 일단은 원가 기준으로 가격을 책정하는 거잖아?

가격 책정이 항상 일관될수는 없는게 예술품 뿐만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사 생필품조차도 가격이 제 멋대로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걸 마케팅이 잘 됐다고 부르지. 역시 예술이 상업의 전위인가.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말 조너선 그린이라는 동료 학생은 예술의 정의를 민주주의에 맡기는 작업을 했다.

그는 금속 상자를 하나 만들고 거기에 “이것은 예술입니까?” 라는 질문을 썼다. 그 밑에는 ‘예’와 ‘아니오”라고 표시된 버튼 들이 계수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관객은 투표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이 예술인지 아닌지는 그 상자가 어디에 있으며 누가 그것을 보았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시 도는 그 문제 전체를 완벽하게 구현한 셈이었다. 단, 마지막 결정권은 대개 전문가들에게 있으며, 전반적으로 민주주의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시각적 아름다움과 미적 감각을 원한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대중에게 다수결로 예술을 결정하게 되면, 결과가 구리다. ‘민주주의는 취향이 후지다’는 챕터의 제목이 여기서 나온다. 다수가 좋아할만한 직관적이고 안전한 작품이 선정될 수 밖에 없다. 원래 전위는 소수다.

“내가 얼마나 환상적으로 혁신적인 결 갖고 있는지 너에게 보여줄 테다!” 그러면 예술계는 그를 내려다보며 이런다. “오, 좋아, 멋진 반향이야! 어서 들어와!”

심지어 예술계에는 젊은이들이 만들고 있을 만한 종류의 예술을 암시하는 두문자어도 존재한다. 가장 앞서 나간, 그러나 수용할 만한Most Adranced, Yet Acceptable’의 머리글자를 딴 MAYA가 그것이다.

산업디자인의 아버지’ 레이먼드 로위 Raymond Loewy가 소비자들이 받아들일 만한 디자인에 관한 사회적 제약들을 이야기할 때 만들어 낸 용어다.

MAYA는 마케팅이나 새로운 컨셉 창작물 제작에도 참고 지침이 될 듯.

“동시대 예술가가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꽤 조숙한 태도로 손을 들더니 “스타벅스에 앉아 빈둥거리며 유기농 샐러드를 먹이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거야말로 도시의 화려한 구역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하는 행동을 꽤 정확하게 지적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동시대 예술가들이 하는 일을 알아보며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고서 프로그램이 끝날 때 친구는 다시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제는 동시대 예술가들이 무슨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그러자 아까 그 아이가 다시 말했다.

“그들은 사물들을 알아봐요”

나는 생각했다. ‘와, 이거야말로 정말 예술가가 하는 일에 관한 짧고 예리한 정의인 걸!’ 내 직업은 다른 사람들은 알아 보지 못하는 것을 알아보는 일이다.

……

예술가가 하는 일이란 새로운 클리셰를 만드는 것이다.

예술가가 알아본 사물을 우리 일반인이 그들의 눈을 통해 알아보고 반복해 사용한다. 그러면 클리셰 탄생!

예술가는 클리셰 거리를 던져주는 사람들인 것.

수년 전 갤러리 경영자 사디 콜스Sadie Coles와 나눈 대화 가내 뇌리에 콱 박혀 있다. “갤러리에서 전시할 예술가를 찾 을 때 당신은 어떤 점을 봅니까?”라고 내가 묻자 그는 말했다. “현신이죠! 예술가임에 대한 헌신!”

내가 만나 본 성공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대단히 엄격하게 규율 잡힌 사람들이다. 그들은 시간 약속을 정확히 지키고 많은 시간을 일에 쏟아붓는다. 예술가란 모두 조금은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신화일 뿐이다.

예술가 들은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예술가인 것이 아니라 예술을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예술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나는 이럴 때 키르케고르가 한 말 이 떠오른다. “옛날에 그들은 지혜를 사랑했다. 오늘날 그들은 ‘철학자’라는 칭호를 사랑한다.”

철학을 사랑하는 거냐 철학자가 되고 싶은 거냐.

만화를 그리고 싶은 거냐 만화가가 되고 싶은 거냐.

끝없이 바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예술인은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사회 규범과 조금 결이 안 맞을 수 밖에 없나 싶어 공연예술 하는 후배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진짜 예술가들은 좀 규범적으로 다르냐고.

후배의 답도 이 책 작가와 다르지 않았다. 높은 성취를 이룬 예술가일수록 오히려 사회성이 뛰어나다고.

하긴, 정말 사회성이 부족하면 사회적 명성을 얻기 어려웠겠지. 그 예술이란 것도 결국은 무리를 이룬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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