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지명 선배랑 칠성교를 건너 집으로 같이 간 적이 있었다.
형은 당시 사회대 다른과 여학생과 연애를 하고 헤어진지 얼마쯤 지난 후였다.
자연스레 그 이야기가 나왔나보다.
지명이 형이 체육대회 때 농구하는 모습을 보고 그 여학생이 먼저 다가왔다는 이야기.
그렇게 사귀게 되고, 얼마간 후에 스스로 왔던 아가씨가 스스로 떠나더란다.
형은 마지막으로 둘의 이런 대화를 들려줬다.
“야, 뭐가 잘못된건데. 서로 맞춰가자. 연애라는게 서로 맞춰가는거 아냐?”
-“아니, 연애는 서로 맞춰가는게 아니라 맞는 사람끼리 만나는거야”
……
…..
….
맞춰가는 사람과 맞는 사람
정말 그 여자는 그렇게 생각 했을까?
당시 여자가 지명이형을 더 좋아했어도 그런 생각 했을까?
그랬다면 지명이형은 자신에게 딱 맞는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선택적 인지라는 요술을 부렸겠지.
아니면 안 맞다는 것의 기준을 상대에게 두고 형에게 맞는 사람이 되려고 했을거다.
김동률의 노래 제목이 떠오르는군.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맞다와 안 맞다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십년 넘게 따로 살아 온 성인 두 명이 놀랍도록 잘 맞다는 것은 말 그대로 놀라운 일이다.
그건 흔한 일이 아니며 그 흔하지 않은 붕어빵 같은 사람을 찾는데 젊음을 낭비하는 건 무모한 짓이다.
게다가 한 길 사람속을 모르는데 대체 얼마나 겪어보고 자신과 맞다는 것을 확신할까?
스스로를 조직형 인간이라 칭하는 나는 언제나 맞춰가는 사람이고자 한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인간들이 하나의 조직, 무리에서 살아가면 어긋나고 삐긋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 전제에서 시작하면 조직 생활은 한결 이해하기 쉬워진다.
형수형과 둘이서 태국 배낭여행을 떠날 때 처음 이 전제를 완성했다.
형수형은 더운 걸 싫어하고 나는 에어컨 바람 쐬는 걸 싫어한다.
나는 좀 덜 먹고 덜 놀고 아껴야 되는데 형은 놀 건 놀고 쓸 때 써야한다.
이렇게 다른 두 명이 26일동안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던 방법은?
나는 에어컨 바람이 안 닿게 에어컨 바로 밑에서 자고, 형은 바람이 그대로 닿는 건너편 자리에서 잔다.
형이 가고 싶은 곳은 다 가되 서로의 예산 안에서 이동한다. 형이 사실 자금도 더 댔다.
4일 간의 개별 여행으로 서로를 묶었던 줄을 푸는 시간도 가졌다.
별로 탈무드의 지혜처럼 대단하거나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우린 당연히 다를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하면 대부분 맞춰갈 수 있다.
작년 한 해, 일취월장이란 이름으로 륜재, 용현, 준영, 나 이렇게 4명이서 한 집에서 살고 한 방에서 잤더랬다.
그 자취방에 붙여놨던 구호가 “1441 일취월장 사랑합니다” 였다.
풀어쓰면
“하나를 위한 넷, 넷을 위한 하나, 일취월장 사랑합니다”
이것도 위와 같은 전제를 담고있다.
집단생활을 할 때 ‘전체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 는 식의 전체주의 사고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이건 대의 명분이나 목표가 뚜렷하거나 카리스마형 리더가 존재하는 등 구심점이 강력해야 지속될 수 있다.
자취방에서 무슨 악마의 카리스마를 바라며 대의명분을 이야기 하겠는가?
하나를 위해 네 명이(세 명이 아니란것도 음미해야 한다) 수고하고, 다시 넷을 위해(다시, 셋이 아니란 걸 음미하자) 하나가 희생해야 한다.
한 명을 살리는게 집단을 살리는게 되고, 집단을 살리는게 자신을 살리는게 된다.
이 순환의 시작을 4114로 하지 않고 1441로 한 것은 우리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 부분을 부각하고 싶어서였다.
맞는 사람을 기다리는 이와 맞춰가는 사람.
20년을 넘게 깎이고 덧붙여저 모나게 된 자신의 퍼즐조각과 딱 맞아 떨어지는 이를 어찌 찾을 수 있을까?
감싸주고 싶은 퍼즐을 만나면, 난 기꺼이 찰흙이 되어서 들어간 부분은 메워주고 나온 부분은 감싸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