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결혼식에서 만난 짝사랑의 흔적

성당 결혼식을 처음 경험했다.


논산 훈련소 시절, 햄버거랑 콜라 준다기에 성당 가 본 경험이 있어 섰다 앉았다 반복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역시나 잦더라.


근데 맙소사. 식 후반부에 나오는 이건 성체기도 아녀. 대학시절 쫓아다니던 아가씨가 성당 다닌단 정보를 입수. 무턱대고 네이버에서 성당 기도문을 쳐서 외운 게 성체기도였다. 그냥 수업시간에 그녀에게 말 붙일 구실 하날 만들기 위해.


10년쯤 지났는데 너무 정확히 기억나 결혼식장에서 따라할 뻔 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네. ‘온당치’를 ‘합당치’로 한다 거나. 내가 외운 버전은 정확히 아래 문장이다.


“주님, 제안에 주님을 담기에 온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무작정 외울 때는 저 기도가 언제 쓰이는 지도 몰랐다. 정말 맥락도 없이 무작정이었네. 그녀에게 돌진하던 맘처럼.


생각난 김에, 그 여학생이랑 같은 수업 들으며 주고 받던 쪽지를 찾아봤다. 하… 참 이 수컷. 진짜 애썼구나. 테스토스테론이 장마철 도림천마냥 범람하던 시기였지. 


주고받은 쪽지 중 그래도 덜 부끄러운 부분을 발췌해 추억이란 미명으로 옮겨본다.


(상황설명: 내가 이번주 미대 애들이랑 미팅 나간다는 이야기를 했음)


[그녀] —전략— 그런데 실지 제 친구(미대)를 보아도 미대라고 해서 고흐, 피카소 등에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랍니다.(내가 미대 애들 만나기위해 고흐, 피카소, 램브란트, 곰브리츠 서양미술사 공부해 간다고 했음) 제가 어떤 팁을 안 드려도 알아서 잘 하실 듯 ^-^; 저는 어떻게 하면 이 수업에 의욕을 가질 수 있을까요? 휴 ㅠ.ㅠ 다들 열심히 듣고 있는거죠? 나만… 으으윽… 아무튼, 아! 내일? 주말? 미팅 파이팅이요 ^-^ 나도 미팅해보고싶다-.



[10년전 나] 하하~ 학생회장 경선하면서 여섯번째 공약이 ‘여러분들 연애시켜 드리겠다’는 거거든요.(이거 진짜임. 학과 학생회장 공약이었음) 꽤나 여러 번 미팅을 주선했더니 두 가지가 확실해졌어요. 미팅엔 예쁜 애가 안 나온다, 여자가 말하는 자기친구 예쁘다는 말은 지극히 자의적이다! 00양이 미팅 안 나가는 게 첫번째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죠.

—–중략—-

150명 기업윤리 수강생 중 00양 앞으로는 교수님을 보고 00양 뒤로는 00양을 보고 있을 듯.(우워, 이 느끼함 가득 든 패기 보소. 약간 과장은 있지만, 정말 자리에 앉으면 인근 남학생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질만큼 유명한 아가씨긴 했다.) 

——중략—–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알아요?(이 때도 미팅이건 작업이건 엄청 공부해서 하려고 했구만.)



[그녀] 자기 귀를 그리다가 자신의 그림에 만족하지 못해서?

—-중략—– 

비가 세차게 오는 어느 날! 위독하신 할머니,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여성, 의사인 친구가 길에서 벌벌 떨고 있었더랬죠. 나의 차는 2인승이라 한 명밖에 못 태워요. 이럴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10년전 나] 세속의 정답은 이미 알고있지만 그대로 따르기엔 탐탁치 않고, 나의 대답은

아름다운 아가씨를 내 무릎위에 앉히고 의사는 보조석에 할머니는 그 위에 태워서 의사가 치료하게 합니다. 비도 많이 오고 하니까 슬~슬~ 서행해서 병원으로!


고흐 답변은 정말 신선한대요! 여러 설이 있는데 자기가 좋아하던 아가씨에게 귀를 잘라 보냈다는 설이 유력. 내일(미대랑 미팅하는 날)을 대비해 더 알아봐야겠군요.

그녀는 당시 의대생이랑, 요즘 말로 하자면 썸 타는 중이었고 이내 사겼던 걸로 안다. 훗날 들어보니 그 의대생이 엄청 지극정성이었다던대. 그녀가 술자리 가면 밖에서 몇시간이고 기다리다 태워가곤 했다고.


삭막한 나란 인간에게 이런 추억이나마 있다는 게 고맙다. 장장 편도 두 시간 걸려 여행하듯 찾아간 성당 결혼식이 떠올려준 짝사랑의 기억. 


다시 한 번 읊조려본다. 제 안에 주님을 담기에 온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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