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벼락 같은 글쓰기

최근 글쓰기 모임에서 한 글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겪은, 어느 비오는 날의 작은 불효를 건조하게 푼 짧은 글. 지금 세보니 고작 여섯줄이다.

아찔했다. 현실에 뿌리 내린채 거추장스러운 잔가지가 없었다. ‘좋은 글과 좋은 음악’에 대한 김규항 씨의 정의가 떠오르더라. 

좋은 글은 불편하고, 좋은 음악은 가슴아프다.
– http://gyuhang.net/225

그에 비해 내 글은 왜 이리 곁가지와 덤불이 많은지. 빈약한 현실을 치장하기 위함인지. 담백하지 못한 인간성의 발현인지…

당일 내가 적은 글을 대비하는 심정으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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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세계에서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바꿀 수 있는 건 과거에 대한 해석이죠.

바꾸고 싶은 과거라면, 결국 그 영향이 현재에까지 크게 미치는 사건 아닐까 해요. 예를 들어, 현재 돈이 많았으면 한다면 10년 전으로 돌아가 비트코인을 사 두거나, 더 쉽게는 1주 전으로 돌아가 로또를 사면 되겠죠.

이런 허황된 거 말고. 곱씹어보면 현재의 내게도 유의미한, 바둑에서 말하는 복기라 할 만한 유익한 무슨 사건이 있을까 궁리해봤습니다.

아, 떠오르네요.

대학 복학하고 전공수업 시간, 마음에 드는 타과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 여학생과 항상 붙어다녔는데, 그 나머지 한명은 다른 수업에서 저와 일면식이 있는 학생이었죠. 수업시간 오가며 그 무리에 수작을 부리다 셋이 점심 한끼하자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 날 그 장면이 선명히 기억나네요. 그 여학생들은 노어노문학과였습니다. 인문대 1층 로비에서 12시에 만나기로 했어요. 5분쯤 먼저 가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제가 맘에 두는 그 여학생 혼자 나오며, ‘다른 친구는 갑자기 일이 생겼는데 어떡하죠?’라는 거예요. 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어쩌면 너무 조건반사적으로) ‘아, 어쩔 수 없죠, 그럼 다음에 다 함께 시간되면 식사하죠.’라며 바로 인사하고 헤어진 후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화장실 거울에 비친 저를 보며 ‘나도 참 병신이다’ 싶었네요.

아마 그 여자애한테 맘이 있는걸 알고 다른 친구가 나름 자리를 마련했을 확률이 높겠죠. 대학생 때 저는 ‘명분’을 엄청 중시하는 사람이었거든요. 당시 학생회 활동하며 무슨 국가와 역사의 부름을 받은마냥 명분 있는 일에는 사적인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지 않았는데. 내 사익과 사심을 드러내는 건 몹시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조금 능청스러웠으면 될 것을, 대2병에 걸린 경직된 사고와 사심을 드러냈다가 상처받을지 모른다는 소심함 때문에 그 짧은 시간에 어이없는 선택을 한 겁니다.

그 때 그녀와 식사를 못하고, 결국 사귀지 못한게 지금 아쉬움의 본질은 아닙니다. 제 심리적 결계를 넘어서지 못한 게 핵심이라고 봐요.

실제 함께 식사했다면, 상대에게 더 호기심이 생겨 연애를 했을 수도 있고 혹은 전혀 아니다 싶어 든든한 점심 한끼로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첫사랑도 지독한 짝사랑도 아닌 낮 12시 헤프닝이 커봤자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다만, 그 때 내게 다음 식견으로 올라설 수 있는 계단이 잠깐 펼쳐졌는데. 이내 도망쳐버렸던 선택이 아쉬운거죠.

그때 그 계단을 올라섰다면, 지금은 더 높은 그리고 더 다양한 시야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바둑의 복기로 치자면, 그때 그 한 수 물러선 것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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