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 입 속의 검은 잎
저자 : 기형도
정가 : 6000원 (할인가 : 4900원)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출간일 : 1994. 02. 20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기형도, ‘홀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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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순 교수님이 ‘여론선전’ 인가 ‘인간커뮤니케이션’ 인가의 마지막 수업시간에 읊어 주신 시.
어느 수업이었건 간에 너무 알맞은 시다. 화룡점정으로 보아도 좋을 듯.시 바깥에서 냉정히 바라볼 수 있는 우리도, 어느 장소 어느 상황에선 울먹이고 실신하는 쪽이지 않을까?
스물 아홉에 극장에서 지병으로 사망
영원히 스물 아홉에 멈춰버린 천재 시인
내가 최고로 치는 이야기꾼 성석제(소설가)와 연세대 동기동창이더라
기형도의 조언에 따라 이것저것 미친듯이 읽어대는 모습이 성석제의 자전적 단편소설에 나온다.
대학 재학 당시엔 기형도가 문학계 선배로서 성석제에게 조언하는 입장이었던 모양이다.
‘홀린사람’ 은 미디어법 때문에 한창 시끄러운 요즘 곱씹어 볼 만하다.
중앙일보 기자였던 기형도 시인이 지금까지 현직에 남아있다면 데스크나 주필쯤 되었을텐데 미디어법 개정에 어떤 논조를 보여줄까.
그의 정치적 성향은 모르지만 신문사에 오래 있었을 것 같진 않다.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 中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 오후 4시의 희망 中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위험한 가계.1969 의 시작 부분인 이 문구를 보고 감탄했다.
맙소사! 병든 아버지가 유리병 알약 쏟아지듯 쓰러지다니!
친구들한테 기형도를 소개 할때면 시집을 펼쳐 이 문구를 보여주고 외친다.
“‘이게 시 아니냐 ! “
한창 읽다가 시인의 나이가 고작 스물아홉이란걸 알고 나를 질투 나게 만들었던 시집
흠… 질투는 나에게도 힘을 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