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 살림의 경제학
저자 : 강수돌
정가 : 13000원 (할인가 : 11700원)
출판사 : 인물과사상사
출간일 : 2009. 02. 23
우리나라에선 크게 두 가지 경제 체제가 경쟁하고 있다.
주류는 세계화를 좋아하던 김영삼 대통령 시절 본격적으로 문을 열고,
IMF를 계기로 신발도 안 벗고 우리 안방에 들어와 아직도 오만상 휘젓고 다니는 신자유주의.
이에 반해 복지를 늘려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북유럽식 복지국가체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이자 조치원 신안1리 마을 이장인 강수돌 교수는 둘 모두에 반기를 든다.
그가 말하는 ‘살림의 경제학’은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사람도 살고 자연도 사는 경제다.
자연을 포함한 모든 대상을 물질화 하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
거기다 우리나라 대안경제책의 주류인 복지사회 체제에도 반격을 가한다는 점.
국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맡아 주는 건 재정 부담도 문제지만 자기 삶에 수동적인 인간을 만들어내기에 옳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가 기존 제국주의의 아전인수 논리를 파헤친데는 동감하지만, ‘네가 올라갔으니 나도 올라가자’는 데엔 동의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 사다리가 올라갈 만한 곳인지 의심해 보자는 것이다.
글쓴이는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다리 구조말고 연대와 사랑을 통한 원탁형 구조를 만들자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지역 공동체와 연대를 통한 살림의 경제학의 모습이다.
앞으로 저성장, 저속도, 저소비, 간소함, 검소함, 다양성, 순환성, 관계성, 건강성 따위가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핵심 기준이 될 것이다. 이런 기준들은 결국 일중독, 소비중독, 물질중독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며, 성장 지상주의, 과학기술 만능주의, 발전 지상주의, 현대화 맹신 등으로부터도 빠져나오는 것이다. 예컨대 부탄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물량 위주의 GNP 대신 GNH(gross national happiness)를 국정 지표로 삼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 88쪽
글쓴이는 ‘지속가능한 성장(개발)’ 역시 지속가능보다 성장에 방점이 찍힌 논리라고 말한다. ‘지속가능’이란 말은 성장 논리를 지속하기 위해 갖다 붙인 말이라는 것.
영국 사회학자 테오도르 젤딘의 ‘인간의 내밀한 역사’에 따르면 ‘주말’이란 말은 자본가가 만든 말이다. 사실상 18세기까지 영국인들은 요일을 가리지 않고 쉬었다. 사람들은 토요일, 일요일에 마신 술을 깨느라 월요일, 화요일까지 쉬면서 닭싸움이나 권투, 축구를 즐기거나 필요한 것을 장만했고, 개인의 필요에 따라 수요일까지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당시엔 일과 휴식, 놀이가 통일되어 있었으며 자율적으로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전후로 공장 시대가 열리면서부터 모든 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중략…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내면적 욕구에 솔직히 반응하며 매 순간 만족과 행복을 느끼며 살기보다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어쩔 수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그런 삶을 산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살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할 날이 오겠지’하는 막연한 기대를 한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해보라. 막연한 미래의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그날’은 비로소 ‘땅 밑’에 가서야 온다.
– 131쪽
유럽 여행 다녀온 친구들의 하나같은 이야기가 저녁이나 주말에 문 여는 가게가 없어 불편하단 거다.
반면 미국과 우리나라는 저녁에 상점들이 불야성을 이룬다.
예전에는 24시간하는 곳은 편의점밖에 없었는데 이제 김밥천국을 비롯해 맛집이니 원조니 하는 음식점들도 24시간 영업을 한다.
게다가 찜질방, PC방 같은 몇몇 업종은 거의 24시간 당연영업 아닌가.
잠깐 딴 데로 새서, 24시간 영업하는 음식점은 자기네들이 무슨 간판을 걸었든 맛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24시간 내내 신선한 재료를 조달할 것이며 맛을 내는 ACE 요리사가 잠 안 자고 24시간 근무를 하냔 말이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슝~
유럽 애들이 주말과 저녁에 문 닫는 이유가 뭘까?
장하준 교수 대담집을 보면 유럽 애들은 ‘그거 한 푼 더 벌어서 뭐 하나, 나는 그냥 가족들이랑 알콩달콩 시간 보내련다’ 라고 하는데 미국 애들은 ‘어떻게든 한 푼 더 벌어야’ 되니까 야간 근무도 마다 않는단다.
이런 문화니까 저녁에 일할 사람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상대적으로 시급이 싸고, 저녁과 주말에 일 안해도 되는 부자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24시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이 살기 좋은 건 유럽보다 미국이란다.
한국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
국가 총생산이나 1인당 생산액 따위를 따져보면 미국이 더 높을지 몰라도 유럽 애들은 삶의 질을 생각하는 거지.
유럽인들이 ‘카르페디엠(현재를 즐겨라, 현재에 충실해라)’이라면
미국과 우리나라는 ‘행복해질 거야(어느 천년에?)’
백수생활 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지.
행복을 유예하지 말 것!
맥도날드 자본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 그림은,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중국이나 방글라데시에서 유혈적 아동 노동으로 만든) 장난감에 현혹돼 싸구려 햄버거에 입맛이 중독되고, 청소년기엔 영업 지점에서 시간당 최저임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비정규직을 당연시하고, 나중에 결혼한 뒤 일터에서 과로와 고용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자기 아이의 손을 잡고 집 근처의 맥도날드 가게로 가서 외식을 하는 그런 일상이다.
– 167쪽
청소년 문화센터에서 일하는 누나가 맥도날드 알바 시절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정기적으로 본사에서 검열 같은 게 나오는데, 검열 항목에는 정확한 조리법을 지키고 있는가도 포함돼 있단다.
근데 그 정확한 조리법이란 게 미국 맥도날드에 맞춘 거라서 한국인 입맛에는 별로라네.
그래서 평소에는 우리 입맛에 맞게 무슨 소스를 덜 넣는다든지 하다가 검열 오면 어메리칸 식으로 조리해 낸단다.
하지만 사람들이 맥도날드 입맛에 길들여지면 입맛 차이가 점점 줄어들고, 미국 맥도날드 입맛이 세계의 입맛이 되는 거지.
19세기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개척의 첨병으로 선교사를 보낸 거에 비할 수 있지.
선교사를 보내 제국주의 문화를 전파하고 뒤이어 자본과 군사력이 진입하는 19세기 작전.
맥도날드를 보내 미국 입맛을 전파하고 뒤이어 농업자본, 유통, 인력시스템 등이 진입하는 오늘날 작전.
1997년에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멕시코와 미국 모두에서 밀 산출량이 13년간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그간 세계 자본에 의해 주도된 ‘녹색혁명’의 한계를 뚜렷이 드러낸다. 대자연의 순환성을 파괴하는 화학 농법과 기계 농법 등이 결코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세계 자본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외친다.
…중략…
그간의 발전 패러다임이 대자연의 순환 고리를 파괴한 주범임을 철저히 가린 채 적절한 기술적 방책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
그래서 “80의 희생에 기초한 20의 경제성장을 택할 것이 아니라 80의 행복과 민주주의를 위해 20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멈추어야 한다는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가슴에 와 닿는다.
– 172쪽
기술/과학만능주의가 가진 문제점.
농경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이 기술이 발달했다.
그런데 그보다 인간의 소비는 더욱 더 커졌다.
현대 도시인의 아이콘인 “뉴요커”
하지만 60억 인구가 모두 뉴요커처럼 에스프레소와 햄버거를 먹고 고층빌딩에서 사무를 보고 자가용 타고 수백 킬로 밖으로 주말여행을 떠나는 생활을 하게 되면 지구는 멸망한다.
밀이나 쌀 대신 기호식물인 커피 농장을 늘려야 하고, 햄버거 페티를 만드는 소고기 1kg을 만들기 위해 곡물 약10kg을 소모해야 하며, 도시 마천루를 세우기 위해 온 땅을 헤집고 철광석과 석회석을 퍼올려야 한다.
차량 배기가스나 석유자원 따위는 입 아프니 여기까지.
글로벌 스탠더드를 가장한 아메리칸 스탠더드
그걸 원래 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전 세계인이 뉴요커가 될 수는 없다.
뉴요커가 전 세계인과 공존하는 방향으로 달라져야 하는 것.
아무도 부유해지려고 하지 않으면 모두가 부유해질 것이고,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
– 가톨릭 노동운동의 창시자 피터 모린, 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