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책 제목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저자 : 장 지글러
정가 : 9800원 (할인가 : 6270원)
출판사 : 갈라파고스
출간일 : 2007. 03. 12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 라고 썼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법칙은 사회정의를 보장한다. 세계시장은 규범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의 집단적인 의지를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 -169쪽

옮긴이의 말을 제하고 198쪽에 달하는 책의 끄트머리에서 이 글귀를 보는 순간, 독후감은 이 문구로 시작해야겠다 싶었다.

 

‘법치주의’라는 말이 있다.

촛불시위 당시 이명박 정부가 상당히 강조하던 말이다.

근데 이 법치주의는 힘대로 돈대로 빽대로 하지말고 우리들이 정해놓은 룰대로 하자는게 핵심이다.

 

‘국민들 임마 너희들 나라가 만들어 놓은 법 잘 지켜!’ 이게 아니라,

‘아무리 힘 있고 빽 있는 애들이라도(그게 전에는 왕이었고 지금은 자본가나 권력가쯤 되겠지) 예외 없이 사회가 사전에 합의한 룰 대로 시시비비를 가리기로 해’ 요거다.

 

한 마디로 자본이나 기타 사유화된 권력이 아닌 공동체가 공유하는 사전에 합의된 가치(곧 법)에 의해서 사회를 움직이자는 이야기.

제길, 한 마디가 너무 길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굶는 사람들이 게을러서?

경작지가 부족하고 기후가 안 좋아서?

사막화가 계속 돼서?

 

위의 답들은 틀리거나 부분적인 답이다.

아무리 게을러도 자기가 굶어죽는데 입에 밥 떠 넣는것도 귀찮아 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은 자살 방법으로 기아를 선택한 것일 뿐이다.

경작지가 점점 사막화 되는 것도 기아의 한 원인이기는 하나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이미 인류의 작물 생산능력은 120억명을 먹일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1984년 FAO의 평가, 당시 농업생산력을 기준으로 계산 – 책 37쪽)

 

단 하나의 고득점 답을 고른다면,

세계 인구 7명 중 1명이 기아 상태에 처한 것은 사회구조의 문제

세계화를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2005년 기준으로 8억 5천만명이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데 미동도 않는다.

그 효율적이라는 시장이 남아도는 농작물을 굶주리는 이들에게 보내지는 못한다.

이것이 주류 경제학이 말하는 효율인가?

무엇을 위한 효율인가?

자원을 빨리 소모하기 위해 생산과 소비 싸이클을 촉진하는 효율성을 말하는건가?

그래서 풍년이 들면 논과 밭을 갈아 엎고 태평양에 밀을 쏟아붓고 오는건가?

 

개개인이 구호기금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인류 보편의 이성으로 생각했을 때 합당치 않은 식량유통구조(곡식이 투자란 이름하에 투기대상이 되는 등), 강대국들의 사실상의 식민지배, 다국적 기업들의 자본지배, 이런 세계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것이 장 지글러가 루소의 글을 인용하며 말한 ‘법에 의한 해방’이며, 이는 민중의 집단 의지를 통해 마련할 수 있다.

정치가 물리, 경제, 미술 이런 식으로 떨어져 있는 무슨 별도 분야가 아니다.

그냥 우리 사는 방식을 정하는게 정치다.

그러니까 세계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정하는건 세계 정치다.

 

특히나 정치의 기원을 잉여 생산물의 분배에서 찾기도 하지 않는가.

우리 나라를 비롯한 먹고 살만한 나라들의 잉여 생산물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그 룰을 새로 짜는 것이 필요한거다.

 

덧붙여, 잉여 농산물의 이전 만이 만사가 아니다.

충분히 자력으로 식량을 생산해서 기아를 해결할 수 있음에도 커피나 콩 등의 수출작물만을 강요받는 사회 체제나, 자원을 노린 강대국의 지원을 받는 군부세력을 제거하는 문제 등이 모두 정치의 영역이다.

 

 

비록 한 번 밖에 안 간 농활이지만, 밥 먹기 전에 부르던 ‘밥가’가 생각난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서 못 가지듯이…… 노나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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