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처음 맞선을 볼 때 맨 먼저
양반인지 상것인지 신분을 물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처음 눈이 맞았을 때 맨 먼저
집안과 학벌을 물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시대의 어둠에 맞서 우리 함께
사랑으로 동행하리라 다짐했을 뿐
지금 너는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맨 먼저 무얼 묻고 헤아리는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를 먼저 탐색하는가
신분과 집안과 학벌까지를 동시 탐색하는가
글로벌 카스트로 재림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신분장벽
우리 스무 살 할아버지 손에는
신분제를 타파하는 죽창이 들렸고
우리 스무 살 아버지 손에는
계급차별에 맞선 총이 들렸고
내 스무 살 손에는
군사독재와 계급체제를 무너뜨릴
화염병과 팜플렛이 들렸었다
스무 살,
지금 네 손에는 무엇이 들렸는가
– 스무살의 역사,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325쪽
오늘 스무살이 된 친구들 손에는 맥주 아니면 토익 책,
이미 몇달 전부터 재수 기숙학원에 들어간 친구들에게는 수능 모의고사지가 들려 있다.
그렇다면 나의 스무살 시절에는?
……
아무것도 묻지 않고 시대 어둠에 맞서던 시인의 스무살이 지나고 나니 다시 시인의 아버지 시대가 왔다.
가임기 남녀가 만난 자리에서는 학벌과 집안이 최대 화두가 아닌가…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끝내 이 질문은 묻어두어야 한다.
학벌이란 언덕을 넘어설 때 까지.
전공이 뭐에요?
만약 필요하다면, 이 질문으로 대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