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 통행로, 발터 벤야민

※ 모바일에서 읽기 편하게 임의로 문단을 나눈 곳이 많음을 일러둔다.


주유소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 말이다.
……중략……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더 적합한 형식들, 예컨대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 믿음 만으로 일어서는 확신 말고, 사실이 받쳐주는 확신을 세우자. 적어도 거기서 사고의 집을 짓자.



국도는 직접 걸어가는가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그 위를 날아가는가에 따라 다른 위력을 보여준다. 텍스트 역시 그것을 읽는지 아니면 베껴 쓰는지에 따라 그 위력이 다르게 나타난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은 자연 풍경 사이로 길이 어떻게 뚫려 있는지를 볼 뿐이다. 그에게 길은 그 주변의 지형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펼쳐진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그 길의 영향력을 경험한다. 

비행기를 탄 사람에게는 단지 펼쳐진 평원으로만 보이는 지형도, 걸어서 가는 사람에겐 돌아서는 길목마다 먼 곳,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는 곳, 숲속의 빈터, 전경 들을 불러낸다. 마치 전선에서 지휘관이 군인들을 불러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베껴 쓴 텍스트만이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린다. 이에 반해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사람은 텍스트가 원시림을 지나는 길처럼 그 내부의 새로운 풍경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아의 움직임을 따라갈 뿐이지만, 텍스트를 베껴 쓰는 사람은 텍스트의 풍경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필경사는 문자문화의 비할 바 없는 보증인이며, 필사, 즉 베껴 쓰기는 중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다.


–> ‘속도가 시공간을 압축한다’는 개념은 대학 시절 교수님이랑 재래시장 지나면서도 나눴던 건데. 압축은 곧 훼손이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며 놓치는 풍경들, 가끔은 무삭제 원본을 경험해 보자.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 

어째서인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한 창문, 구름,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은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감정은 여인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새떼처럼 푸드득거린다. 그리고 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은 사랑하는 육체의 그늘진 주름살, 투박한 몸짓,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을 찾아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안전하게 은신처 안에서 몸을 움츠린다. 

사모하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떨림은 바로 거기, 결점이 되고 비난거리가 될 만한 것 안에 둥우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 아무도 모르는, 나만 아는 그의 결점에서 환희를 느끼는 것. 
앞 문장의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부분을 읽다 성시경의 연연을 듣고 오느라 독후감 쓰는 게 지체됐다.



응급처치

아주 복잡한 구역, 여러 해 동안 내가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도로망이 어느 날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곳으로 이사하자 일순간 훤해졌다. 마치 그 사람의 창문에 탐조등이 세워져 그 지역을 빛다발로 분해해 놓은 것 같았다.


–> 세계적 석학의 중2병스러운 애인 예찬이랄까.



선물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선물 받는 이가 그것을 받고 경악할 정도로 깊은 감명을 주어야 한다.


–> 이런 선물을 준 적, 언제가 마지막이었던가. 혹은 경탄이 아니라 정말 경악은 아니었던가.
아크 등

누군가를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 이 책을 사게 만든 한 문장.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작가의 진짜 저의를 알 수 없었던 문장. 이제는 나의 해석으로 분해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여기저기 맞춰보게 된다. 그렇게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일을 시도해 보게 됐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진, 수십만의 사람들을 얽어 맨 지금의 이러한 궁핍은 모욕적인 것이다. 더러움과 구차함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만들어진 벽처럼 그들 위로 높이 솟아 있다. 

누구나 자기 혼자서는 많은 것을 참아낼 수 있지만, 만약 짐을 짊어진 모습을 자신의 부인이 보거나 혹은 부인이 이를 감당하는 모습을 보면 수치심을 느낀다. 혼자 있는 사람은 많은 것을 참아도 무방하고 숨길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참아도 된다. 

그러나 그 가난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그의 민족과 가정 위에 드리우는 경우에는 결코 가난과 평화협정을 맺어서는 안 된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가해진 모든 굴욕에 대해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이 더 이상 원한의 내리막길이 아니라 반란의 오르막길을 닦게 되는 그날까지 자기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극도로 두렵고 어두운 운명적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매일, 아니 매시간 신문의 논쟁거리로서 그럴싸한 온갖 원인과 결과를 들어 분석되는 데 그친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예속하고 있는 저 어두운 힘들을 그 안에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사정이 이런 한 아무런 희망도 없다.
–> 1928년 독일에서 출간된 책인데, 90년이 흐른 오늘 한국 신문 칼럼에 실려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듯하다. 

개인의 노력과 별개로 사회 체계가 벽처럼 쌓아 만든 궁핍 -> 혼자서는 견딜 수 있지만 가족과 민족을 위해서는 결코 가만 있어서는 안 됨 -> 지금 개인의 고통을 원한으로 삭일 것이 아니라 반란으로 치닫게 해야 함 -> 역설적으로, 개인의 고통을 사회 체계의 문제라고 매스컴을 통해 떠들기만 해서는 개선이 어려움. 개선의지가 사라지기 때문 아닐지.

이것이 정치와 함께 각자 일상의 내실 다지기를 병행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



부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심지어 집중적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다 보면, 거의 모든 책에서 그 사람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을 받는 그 사람은 심지어 주인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적수로 나타나기도 한다. 단편 소설에서든 장편 소설에서든 노벨레에서든 그 사람은 항상 새롭게 변신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 다음의 사실이 추론된다.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 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


–> 상상력은 스티브 잡스 같은 소수에게만 부여된 능력이 아니다. 노력하면 가질 수 있다. 결국 뇌도 근육이고, 상상력도 이두근처럼 집중하고 노력하면 키울 수 있다. 

상상력이 관계를 풍성하게 한다. 평면을 입체로 만들고 1평을 100평으로 늘리는 능력. 얻기 위해 즐거이 노력해야 한다.
책 정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304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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