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불편러 일기, 위근우

타일러 라쉬가 매력적인 것도, 단순히 한자성어로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해서가 아니라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 안에 남녀 간 소통 부재가 담겨 있다는 논리적 해석을 내놓을 수 있어서다. 요컨대 그들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이 가득한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소통 가능한 남자들이다. 


종종 왜 ‘뇌섹남’이라는 표현은 있지만 ‘뇌섹녀’가 없느냐는 정당한 비판이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남성의 지성이 여성의 그것보다 중요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합리적 소통이 가능한 남성이 적어 ‘뇌섹남’이 비교 우위를 차지할 수 있어서다.


역시 지난해 대표적인 신조어 중 하나가 ‘개저씨’라는 건 그래서 흥미롭다. 소위 최초의 뇌섹남이라 할 수 있는 부류의 장점은 개저씨의 반대 항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적인 제목인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라는 책에서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불가해한 사건이었던 파리 테러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불가해함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테러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사건을 재구성하려 했다. 그의 출발점은 “인간이 행한 것 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원칙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한 원칙이다.

–>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로 넘겨버리는 건 정말 지적 한계를 만나서가 아닐 거야. 꾸준히 파고 들 끈기, 거기에 소요되는 에너지를 감당할 체력의 부족, 혹은 진실을 직면할 때 감당할 공포 때문일 듯.


뇌섹남은 결국 ‘여성이 대화가 통하는 남성에게 붙여주는 유쾌한 훈장’ 같은 것.



1994년의 마지막 밤 나정에 대한 칠봉이의 고백에는 짝사랑 특유의 자기연민이 없다. 


…중략…칠봉이 정말 좋은 남자인 건, 자기연민에 징징대거나 자기만족에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한순간도 선의라는 이름으로 나정에게 부담을 준 적이 없다.


…중략…중요한 건, 자신이 얼마나 비싼 돈을 쓰고 얼마나 선의를 품었는지가 아니라 상대방의 필요를 고려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의 차이이기도 하다. 후자의 경우 상대방에게 선의를 베푸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소중하고, 그럼에도 짝사랑하는 모습이 너무나 가련하다. 그래서 정작 그들의 마음에는 상대방의 자리가 없다.


…중략…과도한 자기연민은 세상의 상을 왜곡시켜서라도 세상 앞에 불쌍한 나의 자아상을 만든다. 이 자의식 비대의 세계에서 그는 세상의 모든 걸 불쌍한 자신을 위한 스토리로 소비한다. 상냥해도 피곤하며, 상냥하지 않으면 자칫 폭력적으로 발현된다. 그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건 세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고 자신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몸은 항상 과체중을 희망했으나, 자의식은 늘상 다이어트가 필요했다. 상처받으면 머릿속에 작고 흰 강아지 한 마리를 떠올려 나와 동일시했다. 아니, 상처받은 자의식 덩어리를 형상화했다는 게 정확할 듯.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작고 연약한 흰둥이. 실은 내가 부숴야 할 작고 흰 악마였던 거다. 직시할 수 있어야 누구도 해치지 않을 수 있다. 적어도 그래야 부서진 나를 재건할 수 있다.


자기객관화가 어렵다는 걸 월요일 출근길 마냥 매주 느낀다.

책 정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628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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