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그것은 대화하는 일이다.

연애, 그것은 대화하는 일이다. 아무리 신체 활동이 최종 목적지처럼 보여도 실은 말, 말, 말을 하는 게 연애란 말이다.

–> 한 권의 책에서 한 구절만 건지면 된다. 이걸로 족하다. 나머지는 부록이다.
벤저민 프랭클린 선생이 말씀하셨다.
사랑받고 싶으면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받을 만하게 행동하라.
온통 자기밖에 모르는, 타인 이해에 깜깜절벽인 사람도 흔하다. 그야말로 자기애가 넘쳐 보이는 그런 태도를 두고 정말로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타자와 생각과 감성의 공유 지점을 형성할 줄 모르는 것은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밖에 없는 것은 실상 자기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그간 내겐 자의식이 카푸치노 거품마냥 껴 있었다. 자기객관화를 하려 해도 거품에 가려 바닥의 에스프레소를 만날 수가 없었지. 크게 잔을 뒤흔든 후에야 거품을 걷어낼 수 있더라.
—————-아래부터는 인상 깊은 구절 발췌—————
없어 보여서 여자들이 안 따를 거라고? 천만의 말씀. 애인을 360명쯤 거느릴 셈인가?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두루두루 인기 많은 것은 다 꽝이다. 애인은 한 사람이면 된다. 한 사람이 부족하면 세 사람, 세 사람도 적다 싶으면 한 다섯 명 정도 애인을 둘 정도면 되지, 거리에 나가면 누구나 쳐다보는 장동건 같은 외모를 갖추려고 노력할 필요가 뭐 있는가. 아무 의미 없다. 단 한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면 되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왜 좋아하게 되었느냐 하면 뭔가 달라 보이기 때문이라는 거,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좋아하게 되면 상대방이 달라 보이는 거다.


나는 한 분야를 깊숙이 들어가는 게 독서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동안 내가 무수히 본 사례가 그렇다. 다채롭고 수많은 책을 섭렵해 다양한 분야에서 박학다식한 것은 그 사람의 격조가 되지 않는다. 식견을 갖췄다 함은 한 분야를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야를 내 것으로 만들면, 가령 내가 미술사에 관한 식견이 굉장히 높아서 그 분야의 기본 상식을 많이 알고 고유의 의견도 있다면 다른 분야에 대한 무지는 용서가 된다. 또 하나,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들면 비교적 쉽게 다른 분야에 대한 연역이 가능하다.



내가 오빠 마음으로 수영의 결혼을 염려한 건 상식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해서일 것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백년해로 관념에 붙들려서 그런 것 같다. 부부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그러니까 인생의 최종 순간까지 동행해야 한다는 신앙 말이다. 수영의 결혼을 계기로 관점을 바꾸기로 했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시간까지 함께 사는 행위를 결혼이라 부르자.


한스 페터 뒤르의 매우 고매한 책 ‘음란과 폭력’을 참조해본다. 인간이 벌이는 어떠한 행동도 비정상의 영역일 수 없으며, 성적 행동 가운데 유일하게 변태로 규정되는 것은 신체적 상해를 입히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뒤르에 따르면 상상 가능한 어떠한 행위도 변태가 아닌 정상 행위라는 것이다.



사람이 착한 것은 심성의 문제라기보다 일종의 생존 전략이라. 남에게 착하게 행동함으로 해서 자기 존재 가치를 형성하는 인정 투쟁이 실체다.



어떤 유명 시인은 바흐 음악을 들으면 섹스를 느낀다고 했는데 그 섹스보다 더 강렬한 것이 도스토옙스키, 토마스 만, 이사벨 아옌데가 구축한 장대한 서사다. 이런 고전을 읽어나가면 곧장 생겨나는 세 가지 효용이 있다. 첫째, 시간이 흘러간다. 둘째, 자아가 확장되어 다른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가 변한다. 셋째, 교양적 욕망을 자극하는 화제가 풍성해진다.



상황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양태를 두고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이 말했다. ‘인간의 행동은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렸다기보다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책 정보: ‘작업 인문학’, 김갑수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46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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