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재배 인턴기] 1. 문화생활

포스코건설 엔지니어링 센터 8.

출입구 앞에 사무실 난초처럼 뿌리 내리고 앉아있는 인턴.

난초인턴으로 생활한지 어언 21.

 

이건 나와 물아일체 상태에 이른 내 자리 난초 재배기라 불러도 좋다.

 

여튼, 어제는 문화생활에 목마름을 느껴 포항 시내로 향했다.

20대 후반 남자들이 가장 즐긴다는 문화생활!

바로 서점에서 새 책 냄새 맡기와 전자오락실에서 철권 구경하기

 

양질의 도서를 넓고 쾌적한 매장에서 제공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텨온(?) 학원사!

포항시내에 토종 서점이 버티고 있다는 게 대단, 혹은 대견했다.

 

대구도 제일서적이 만남의 장소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몇 년 전 그 자리에 스타벅스가 들어선 건 내게 상징적 의미가 컸다.

서점이 가고 다방이 왔다.

텍스트가 가고 이미지가 왔다.

서점이 텍스트를 상징한다는 건 너무 당연한 거고.

스타벅스가 이미지란 건, 사람들이 스타벅스에 가는 건 이미지를 구매한다는 느낌이랄까.

나는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여인.

그런 하나의 정형화 된 이미지.

대구 시내 서점들이 하나씩 사라져 거의 전멸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교보문고와 영풍문고가 들어서더구먼.

 

대형서점의 독식이니 뭐니 해도, 그 유동인구를 감당 할 서점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

시간이 흘러도 약속 장소로 최적이니까.

 

여기는 다시 포항.

학원사도 큰 편이지만, 예전 대구의 제일서적이나 그보다 작은 하늘북 서점 정도의 규모나 분위기는 안 났다.

1,2층으로 운영 되는데 1층은 각종 문제집, 2층은 그 외 나머지!

우리나라 출판시장이 학교 교육과 문제집에 얼마나 편중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듯.

 

신간 코너에서 내 인생의 만화책이라는 에세이를 보며 이두호의 임꺽정을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다.

슬램덩크나 드래곤볼은 우리세대에 그렇게 깊이 침투했는데 왜 한국 만화들은 그게 안 될까.

만화를 연재하고 출판하는 유통의 문제일까, 재미있고 없고의 콘텐트 문제일까?

슬램덩크의 대사를 줄줄 외는 친구는 있지만 둘리나 임꺽정, 공포의 외인구단(이건 좀 우리세대가 아니지만) 명대사를 말하는 친구는 없거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 눈에 밟혔다.

읽어봐야 되는데……

내 학과 생활 4년을 백업해 준 승현 조교님이 일종의 삶의 롤모델로 삼는다는 월든.

 

서점 바로 맞은 편에 포항시내 최대 규모(로 추정되는) 오락실이 있었다.

아하~ 이곳은 나 스무 살 시절 포항 사는 공대친구와 함께 갔던 곳이 아닌가!

8년 동안 잘 버텨 주었구나.

오락실도 PC방에 밀려 동네에서 자취를 감추는데.

요 며칠 온게임넷 철권 경기를 보고 한 판 하고 싶어 갔으나, 동네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어 뒤에서 구경만 했다.

 

농구 대잔치가 프로농구로 바뀌면서 흥미를 잃던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학교 마치면 4인용 아케이드 오락기 위에 동전 쌓아놓고 끝판 깨야 된다며 거품물고 버튼 두드리던 그 때의 열광은 사라졌다.

아니, 그래도 프로농구보단 좀 오래갔나?

89스트레이트, 심슨가족, 천지를 먹다, 캐딜락 등등을 친구들과 잇고 이어서 끝판 깨고 나오면 어둑어둑한 거리.

~ 보람찬 청소년의 하루여!

마지막을 불태웠던 4인용 게임은 던전앤 드래곤즈로 기억한다.

 

이곳은 또 다시 포항

2층은 노래방 전용 층!

서점의 층별 구성과 마찬가지로 전자오락시장에서 동전 노래방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

 

여기 또 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오락실 충전 카드.

동전 대신 선불 식 카드를 사서 사용하는 건데, 금오공대 다니던 스무 살(이 자주 나오네) 시절 학교 근처 오락실이 이 카드를 사용했다.

1000원짜리 카드사면 1100원 들어있고 이런 식.

 

동전 노래방에 들어가기 전 자판기에서 코코팜을 사 먹었다.

하루 종일 뿌리내리고 있느라 수고한 나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어느 노래부터 부를까?

언제부터, 아마 미필에서 군필로 전환한 순간부터 노래방 책을 뒷장이 아니라 가나다 색인부터 보게 됐다.

최신 곡은 몰라서 못 부르고 늘 부르던 곡만 찾게 된 것.

 

, 그래 시작은 휘성의 내가 너를 잊는다로 해 보자.

..

.

이럴 수가! 음향이 너무 작았다.

마이크 안 쓰고 생목으로 부르는데 반주가 내 목소리에 묻힌다!!

오락실에 고유가 어쩌고 스티커 붙어 있더만 전기세 아끼려고 반주 볼륨도 죽였나?

 

흥이 안 나서 가장 가슴저린 부분만 부르고 나왔다.

 

넌 유난히 빛나서 눈이 부신 그 사람이

초라한 나 따윈 곁에 있어도 볼 수 없었던 걸 아니까

우우~ 널 잊어 버린다!

 

다른 방으로 이동

백수가 되면서 시집과 함께 노래방도 끊다 보니 즐겨 부르던 노래가 생각이 안 났다.

, 그래 이런 눈물 나는 상황을 시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노래!

이승환눈물로 시를 써도

사실은 책을 넘기니까 젤 먼저 눈에 들어와서 눌렀다.

 

새로이 또 누구를 기다리나요, 세상에 둘도 아닌 당신인 것을…

사연이 너무 많아 찢어버린 편지.

그댄 그 의미를 아나요?

 

이승환 이 아저씨 정말 맛깔 나게 부른다니까!

 

다음 곡은 헌신적 인턴생활을 다짐하며 휘성의 다쳐도 좋아와 취업 도전 일 년을 자숙하며 일년이면을 불렀다.

 

휘성 이 자식아!

노래가 왜 이렇게 어려워.

반주 중간에 끊었다가 갑자기 시작하는 부분은 박자 어떻게 맞추는 거야.

가사는 맘에 드는데 급격한 음의 변화를 못 따라 가겠군.

 

휘성은 나와 안 맞아.

 

다음 선택한 곡은 안치환의 연탄 한 장

그래!

이것이 나의 색깔! 나의 감성!

 

삶이란 나 아닌 누군가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아침에

나 아닌 다른 이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나는 만들고 싶다

 

 

2000원짜리 카드 사면 3000원 충전되는데 아직 2000원 가량 남았다.

다음엔 부를 곡목을 정해서 가야지~

 

여기까지, 난초재배 인턴의 문화생활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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