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신분 끝, 일반인 신분으로 보낸 첫 날.
물이 나오지 않는다.
오전 내내, 일년 동안 비워뒀던 내 방을 정리했다.
중학교 체육복부터 작업복으로 써서 소매가 다 헤진 옷까지 정리하니 한 박스가 나왔다.
안 입는 옷을 이렇게나 많이 쌓아두고 살았구나.
대학 4년을 다녀놓고는 조그만 4단짜리 책장하나 다 못 채운다.
그나마 전공서적은 그 중의 한 단도 다 채우지 못하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책 값이 비싸니 어쩌니 하지만 제본한 책조차 몇 권 없다.
젤 윗 칸에 꽂힌 시집이 고작 세권.
몇 번이나 시집으로 선물하는 바람에 재고가 바닥났다.
노트북으로 노래를 틀려니까 저작권 문제 때문에 삭제된 파일들이란다.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
방을 정리하면 개운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뭔가 아니다.
두류도서관에 갔다.
네이버 지도로 검색해보니 2.9km
일부러 지그재그로 걸어갔다.
결코 그런게 아니다.
경북대 도서관보다 불빛이 어둡고,
열람대는 좁으며,
휴지는 동전 넣고 사야하는 화장실 때문에 그런게 아니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은 열람실 눈빛들이 낯설어서는 더욱 아니라 말하고 싶다.
자리에 앉아서 증권투자상담사 책을 펼쳤다.
문맹이 된 기분이다. 읽어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싱숭밍숭맹숭내숭… 열람실을 나와 전화를 했다.
KTV에 작가로 일하는 조영이 누나다.
이럴수가! 내 목소리가 완전 변했단다. 자꾸만 준희가 맞냐고 묻는다.
졸업하고 나서 나의 정체성까지 의심받았다.
전에는 말이 빠르고 더 하이톤이었단다.
지금은 전보다 확실히 저음이어서 완전 다른 목소리처럼 들린댄다.
난 금융위기로 인해 경기도 디프레션, 목소리도 디프레션 됐다고 했다.
이제 감이 왔다. 내 인생의 사인 주기율에 의해 저점 부분에 다다른거다.
목소리가 변했다.
톤이 올라가지 않는다.
군대동기 김대현에게 전화했다.
싱숭밍숭맹숭수리숭숭하다고 했다.
고양이는 잘 크냐고 했다.
요즘 발정기라 중성화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도 중성화 수술이 필요할 것 같다 했다.
전화하면서 이미 어느정도 정리가 됐다.
이 기분은 물 때문이다.
군대 전역 할 때도 만감이 교차했지만 그 땐 새로운 힘이 펑펑 올랐다.
지금은 다르다. 그때와 다르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