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청즉무어(水至淸卽無魚), 인지찰즉무도(人至察卽無徒)

피노키오가 아주 흥미로운 주제를 던져 주었기에 일단 여기에 짤막한 답장 형식으로 글을 올린다.

사실 여기서 가지 쳐 나가는 이야기 몇 개를 생각했는데 한창 논픽션 작성주간이라 고것들은 추후를 기약하자.

아, 그래 노키오 노키오 피노키오~ 관절의 투박함이 슬픈 여인이여.

먼저 네 질문은 대답하기가 상당히 애매하다.

네가 청즉무어의 뜻을 모르고 나한테 물었을린 없고,
전에는 흘려듣던 글귀가 오만가지 갈래로 다가온다고 했는데,
그럼 어떤 자극을 받았기에 하나의 단어가 오만가지 관념을 떠올리게 했는지가 중요하거든.

청즉무어는 비유법이고 비유법엔 그 자체로 사건을 명확히 규정하지는 못하는 한계가 발생한다.
시는 은유나 비유가 자유로워서 독자 또한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시인의 본 의도를 헤아리기는 어렵지.
장점과 단점이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경우인데, 우리 같은 사회과학도들은 재밌다고 헤~ 하지말고 지양해야 할 자세인거지.
적어도 사회현상을 바라볼 땐.

오늘은 길게 늘어놓지 않기로 했으니 여기서 요점정리.

청즉무어는 결국 물(나)과 물고기(너)의 관계맺기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나와 너는 이미 스무살이 넘어 인격형성이 거의 끝난 상태라는 것.
이미 모양이 굳으면 다시 열을 가해도 형태가 변하지 않는 열경화성수지와 같단 말씀.

네가 고민할 대다수 물고기는 아마 ‘이미 만들어진’ 물고기겠지.

물고기는 못 바꾼다. 아마 그 물고기 애비애미도 못 바꿀걸?

그럼 어떻게 해야하나?

물이 바뀌어야지.

그 물고기를 내 속에 품고 싶으면 나라는 물이 변해야 한다.

그 물고기가 흙탕물을 좋아하면 네 바닥을 긁어야 하고, 맑은물을 좋아하면 조신하게 가라앉아야 하지.

정녕 물고기를 바꾸고 싶으면 일단 물고기를 네 품에 안아서 완전히 네 환경에 적응시킨후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 때 가서 맑히든지 붉히든지 네 마음껏해도 완전히 정착한 물고기는 쉬이 떠날 수 없겠지.

그럼 여기서 끝?
이 당연히 아니라 더욱 우선해야 할 선택이 남는다.

과연 그 물고기는 내가 품을 물고기인가, 아니면 흘려보낼 물고기인가?

바다에 붕어가 살 수 없고 민물에 고등어가 살 수 없다.

아예 타고난 천성과 기질이 안 맞는 경우는 그냥 서로 갈 길 가면 된다.

문제는, 아리송한 어떤 대상과 순간이지.

내 개인적 지향점은 ‘퍼즐과 찰흙’이라는 글에서 밝혔지.

나는 가능하면 많은 사람을 품고싶고 흙탕물도 정화수도 노력여하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

너희들이 그 글을 보고 내게 해 준 ‘조직관계와 이성관계’에서의 갭은 생각해 볼 문제다.

나는 그 둘의 갭이 상당히 컸고, 지금은 반성중이다…ㅜ.,ㅡ…

물고기를 바꿀 순 없다.

물고기는 자신에게 맞는 물을 찾아 헤엄쳐간다.

피노키오는 어떤 물이고 싶은가, 어떤 물고기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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