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타기와 어장관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

알록달록한 표지만 보고 가볍게 시류에 편승한 책인 줄 알았다. 사과하고 반성한다. 크게 배웠다. 특히 결론 부분은 통째로 갈무리 하고 싶을 정도다.

어떤 이는 상대방을 처음 만난 지 사홀 만에 결혼을 결심한다. 한편 썸타기나 어장관리에 임하는 최근의 젊은이들은 상대방과 오랜 기간의 만남을 이어가면서도 그 만남을 본격적인 연애로 발전시킬지를 놓고도 망설이고 머못거린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상대방과 연인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강렬한 호감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만난지 사흘 만에 결혼을 결심하는 이는 상대방을 너무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할 수 있고, 몇 년 이상의 만남 속에서도 연애 앞에서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이는 상대방을 너무너무 총아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망설이고 며뭇거린다고 설명하는 것은 옮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돌 사이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기쁨과 슬픔을 나의 기쁨과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그(녀)의 삶과 나의 삶을 하나로 일체화하는 것은 단순히 그(녀)를 향한 강렬한 끌림이나 호감 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진정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렇게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는 나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는 그런 모습을 나 자신의 진정한 자아로 받아들이는 고차적인 태도나 의지가 형성되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나 자신의 답속에 그(녀)를 아끼고 보살피는 나의 모습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결과적으로 내가 진실로 어떤 인간이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에 의존한다.

만약 내가 누군가와의 첫 만남 이후 얼마지나지 않아 그(녀)가 나의 연인 혹은 미래의 배우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나 자신의 내심에 등장하는 심적 요소 중 어떤 요소들로 나의 참된 자아를 구성할지, 내 자신이 진정 어떤 인간이 될지, 내 자신의 삶이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할지 등의 질문에 대하여 명확한 답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아끼고 보살피는 내 자신의 모습이 그 답변 속에 포함될 때 나는 어떠한 의지적 불확정성도 없이 상대방의 연인이 되기로 마음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정치인이 첫 만남 이후 곧장 상대방과 결혼할 것이라고 결심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 속에서 자신이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결국 그를 사랑하는 내가 어떤 사람일 것이냐.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어떤 나여야 하는지. 어떤 생활양식을 가지고 어떻게 중년과 노년을 보낼건지. 다만 이 질문에 각자가 수월히 답하기에는 시절이 하수상하다.

빅테크 기업들이 3년 계획도 너무 길다고 하는 불확실성 시대라. 지금 당장은 불변에 가까워 보이는 가치인 현금과 부동산과 라이센스(사짜 전문직) 정도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잣대가 된게 아닐까.

그 외의 조건들. 영화를 좋아한다거나. 감수성이 예민하다거나. 이렇게 당장 자산으로 치환하기에 애매한 조건들은 일차원적으로 이성의 관심을 끌 수는 있어도. 진지한 연애를 한다거나 결혼 관계로 가는데 확신을 주는 요소로는 부족한 게 아닐지.

어떤 인간이 바람직한 인간인지, 어떤 삶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인지에 대한 명료한 답변이 사라진 탈진리의 시대, 파편화된 개인들의 중구난방 주장만 있을 뿐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어떤 공통된 합의나 동의가 부재한 이 탈진리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연애 문화가 과거 세대의 연애 문화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나는 썸타기와 어장관리라는 새로운 연애 문화의 출현이 기성 세대의 시각에서는 다소간 뜬금없어 보일 수 있겠지만, 실상 그 연애 문화는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을 상실한, 탈진리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 추측한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나는 누구의 연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고 그러한 망설임이 의지적 불확정성을 낳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썸타기와 어장관리의 배후에는 탈진리의 시대 속에서 잉태된 인생에 대한 회의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나의 어림짐작 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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