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라면 순한맛, 퇴마록

지금 보니 한강물 허여멀건 라면

당시 국내 출판물 심의 때문이었을까. 여러 사람 몸이 찢겨 살해 당하는 참극이 연이어 벌어지는데. 악령이나 악당들에 대처하는 주인공들은 지극히 착하고 미칠듯 순진하다. 특히 귀신이 알몸 형태로 나타나 제대로 쳐다보지 못해 싸우기 어렵다는 식의 반응이 여러번 나오는데. 그짓도 한두번이지 매번 그러니 짜증이 치밀 정도. 이게 유교 탈레반이란 건가.

퇴마록과 동시대 유행하던 성인 무협지는 한권에 두 세번씩 선정적 장면이 있었는데. 퇴마록은 딱 그것처럼 폭력이건 성이건 선정적인 장면은 던져주되 해상도는 극히 낮추거나 모자이크 처리하는 모양새다. 결과론일지 모르나, 그래서 90년대 중고등학생을 포함한 폭넓은 연령이 퇴마록에 열광할 수 있었겠지.

또 어찌보면 90년대 국민학생들을 잠 못 들게 했던 ‘앗 귀신이다’ 시리즈의 선정성을 생각하면…… 대체 심의 기준이 어디에 있나 싶기도 하고. 애초에 균질한 심의라는게 가능한가 의심하는게 더 나을 듯.

내가 변했나, 책이 변했나.

1990년대를 10대에도 살고, 60대에도 살고. 뭐 이런 사람은 타임슬립물 등장인물 외에는 없다. 그런데 90년대에 나온 책을 10년마다 다시 읽으면, 그 시대를 몇번이고 살아볼 수 있는게 아닐까.

과거의 사건에 ‘추억’이란 라벨을 붙이는 순간, 적당히 뽀얀 보정이 들어가는데. 이 책도 90년대 시대상에 보정을 좀 넣어 보면. 당시는 또 낭만의 시대였는가 싶다. 예를 들어 갖은 범죄를 저지르는 조폭 두목이 갑자기 마지막에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 현암을 구하려 한다는 등. 뭔 목숨을 거는 일을 해도 그냥 운명이다 운운하니. 무협 장르물 문법이라 봐야겠지.

각 에피소드 정점에서 눈을 떼기 어렵게 만들던 몰입감은 지금도 그대로지만, 2020년대에도 다른 책을 제쳐두고 읽을 만큼 재밌는 소설일지는 물음표. 책은 분명 그대로 있으니, 나의 취향이 변한걸지도.

잡답) 근데. 영계가 물리적인 현세계보다 더 합리적인 것 같아 재밌다. 강철의 연금술사를 관통하는 게 ‘등가교환’ 개념이니, 이도 완전히 동일한 이야기 아닌가.

영계는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계, 뭔가를 얻으면 다른 뭔가를 주어야 해요. 강한 힘을 얻으려면 상응하는 걸 바쳐야 하죠.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이나 생명을 바쳐야…

남을 멸망시키려 힘을 얻는 자, 자신의 혼을 먼저 불태워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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