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는 개인사를 풀이하는 동양철학 방법론의 하나로 보는게 적합하지 않을까. 누구는 주류에서 인정받지 못한 학문이라고도 하고. 일부 대학에는 명리학과가 있긴 하지만, 현 시점에는 학술적 체계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
조선시대에는 3년 마다 명리학자를 일종의 기술직으로 채용하는 TO가 있었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면 기술직 공무원. 굳이 비슷한 걸 찾자면 하늘의 기운이 땅에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해석한다는 점에서 기상청 공무원 정도가 있었달까.
철학 체계는 그게 설혹 시정잡배의 것이라 해도 그 세계관 안에선 여러 개념이 관계를 가지고 얽히고 섥힌 구조가 있는데. 아주 단순하게 텍스트로만 해석해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기구한 사주팔자’의 클리셰인 ‘남편 잡아먹을 사주’ 같은게 한 예. 명리 세계관에서 여성 사주 중 남자와의 관계가 힘든 부분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게 잡아먹는, 즉 죽인다는 텍스트 그대로 해석을 한다면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식 해석이 된다. ‘그러니 굿을 하거나 부적을 하자’고 제안하는 교차판매의 한 방편으로는 효과적일 수 있겠지만.
이런 식의 대대로 이어져온 명리 해석체계와 실제 상담을 통한 임상 통계는 일부분 존중한다. 다만, 기계적으로 1+1=2가 나오는게 아니라. 왜 그런 해석이 나왔는지. 그 해석이 뜻하는 좀 더 본질적인 이유가 뭔지 더듬어봐야 한다.
예를 들어, 남자에게 재성은 돈이자 여자인데. 재성이란 기운이 없어지면, 즉 돈이 없어지면 여자도 떠난다는 식의 해석이 대표적이다. 반대로 돈을 모으면 여자가 붙는다는 식의 해석도 가능하고.
이는 남자가 돈이 풍족하면 사회적 관계에서 힘을 발현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이성과의 만남 빈도나 영향력을 과시할 여지도 커진다는 식으로 맥락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인간의 이성과 직관을 초월한 해석은 신점에 맡겨두고. 명리라는 기술을 공부하는 사람은 텍스트를 넘어 컨텍스트에서 답을 찾아야지 않을까.
이 때문에 상담 경험이 없거나, 있어도 적절한 피드백 없이 오직 명리를 텍스트로만 공부할 경우 그 해석의 깊이에는 한계가 생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