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 20년 변천사

생애 첫 헬스장 결제가 군대가기 두달 전인 21살때였으니. 헬스장에 돈을 낸 기간은 얼추 20년이 넘었다. 오늘 새로 문을 연 동네 헬스장(짐박스 보라매점)에 가보니. 긴 시계열로 보면 한국의 헬스장도 꽤 많이 변했구나 싶어 기록해 본다.

지금 자리에 앉아 잠깐 과거를 복기하며 내 기억에 의존해 쓰는거니 얼마든지 왜곡이 벌어질 수 있다.

헬스클럽(헬스장) -> 피트니스클럽 ->짐

헬스장보다 더 과거로 가면 육체미 체육관이 있겠지만. 그건 아마 30년쯤 전으로 가야할 듯. 20년 전에는 지금도 가장 범용적으로 쓰이는 헬스장이란 단어가 주류였다. 이때는 그냥 등록하면 2주일 정도 기구를 알려주는 요즘말로치면 OT(오리엔테이션)가 있었고. 별도의 PT는 없었다. PT 형식을 띄는 프로그램도 PT비를 따로 받는게 아니라 그냥 트레이너랑 매일 같이 운동하면서 운동일지를 체크하는 방식.

그로부터 10년쯤 후부터는 좀 더 고급화/세련됨을 표방하며 피트니스 클럽으로 이름이 바꼈다. 물론 전단지와 간판 속 이름만 바꼈지 사람들의 헬스장에 대한 인식까지 바뀌지는 않은 듯. 아마 이때부터 퍼스널트레이닝이라는 새로운 과금체계가 자리잡지 않았나 싶다. 인터넷, 특히 유튜브에 널리고 널린 시청각 자료 덕분에 단순 기구 사용법을 넘어 좀 더 개별화/전문화된 트레이닝을 원하는 수요자와, 새로운 과금체계를 원하는 공급자가 시장에서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다시 10년. 지금은 짐(gym)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보편화된 듯. 그룹 운동(GX)은 코로나 이후로 사라지고. 미국 크로스핏 장에서 흔히 보이는 박스형태 인테리어가, 한국에서는 천장 노출형 인테리어로 나름의 변형을 거쳐 자리잡았다. 유행은 참으로 알 수 없는게. 호리호리한 스키니가 유행이던 시절을 지나. 이제 너도나도 헬창이란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 시절이 왔으니.

요즘 헬스장은, 회원 개개인이 둥둥 떠다니는 하나의 섬

코로나 이후 GX는 사라졌고, 젊은층 열에 아홉은 에어팟 같은 이어폰을 끼고 있으니. 한 공간에 있지만 회원들 간 상호작용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헬스장에서 운동친구를 만들었다거나 맘에 드는 이성에게 접근 어쩌고는 인터넷 커뮤니티 밈이라고 느껴질 뿐.

심지어는 PT 수익을 염려해 ‘회원 간 티칭금지’를 진지하게 규제하는 헬스장들도 많으니. 회원들도 맘 편하게 혼자와서 혼자들다 간다. 상호작용이라고 한다면 내 휴대폰과 에어팟이랑만 하면 된다.

또 하나 놀란게. 샤워시설이 유리로 벽을 만든 1인실 형태라는 것. 역도 연습장도 그렇고. 크로스핏장이나 헬스장까지. 최근에 생기는 운동시설은 1인 샤워부스 형태를 많이 갖추는데. 이게 요즘 시대의 흐름이 아닐까 싶다. 북미는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아예 집에서 샤워한다고 하니. 점차 우리도 이런 추세로 가는 게 아닐까. 20대 시절엔 샤워실에서 서로 몸을 보면서 회원간 농을 주고 받던 경험도 있는데. 이게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 이런 상호작용도 원천 차단됐네.

외산 기구가 마케팅 포인트

과거에는 넓거나, 관장님 경력이 특출나거나, 혹은 목욕탕과 함께 운영된다는 것이 셀링포인트였는데. 이제는 외산 유명 머신들을 많이 구비하고 있다는게 판매요소가 된다.

오늘 오픈한 보라매 짐박스가 바로 그런 경우. 헬스 인구도 늘어나고 유튜브에 정보도 많아지다 보니 뭔가 다른거, 뭔가 좋다는 걸 찾게 된다. 소비자 눈높이도 높아지는 건 당연지사. 수입차가 거리에 늘어나면서 한국 자동차 소비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진것도 마찬가지고. 모든 시장이 그렇겠지.

다만, 가끔은 주객전도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머신은 도구일 뿐인데, 그 도구가 좋아서 어딘가를 간다? 그 머신이 과연 몸만들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까? 좋은 머신으로 몸을 만드는 게 좋은게 아니라, 그냥 좋다고 하는 머신을 써보는 경험 자체가 즐거운걸까?

일반인 수준의 몸짱 만들기는 멀티랙 하나로도 충분한데, 주객전도 느낌이 들 만큼 외산 기구에 열광하는 게 어떤 실익이 있을까 싶다.

여튼, 한국 헬스장 인프라는 짱짱맨

보통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체육시설은 사설 대비 가성비가 좋을 수 밖에 없는데. 정말 헬스장만큼은 그냥 동네 헬스장이 더 가성비가 높다. 한국에서 헬스, 즉 헬스장 가서 하는 웨이트 트레이닝만큼 저렴하지만 고퀄리티로 접근성 높게 즐길 수 있는 체육은 단언컨데 없다.

낮은 단가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가면서 규모의 경제도 이루고. 객단가 높은 PT 자매님들이 보태주고, 연간권 끊고 세번나오는 기부천사 형제님들이 끌어주니. 꾸준히 운동을 즐기는 사람 입장에선 진짜 거저다.

해외 어디를 가나 이정도 시설에 이정도 가격에 이정도 접근성을 가진 헬스장이 있을까?

근데… 헬스장에 20년 넘게 돈을 냈는데. 내 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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