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통과하는 일’_실전 압축 경험

스타트업이지만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적지 않게 받은 시장의 스포트라이트. 그에 따라 꽤 많았을 고객과 직원과 투자자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얽힌데다. 상장하고 엑싯한 성공 경험이 아닌, 끝내 퇴사하고 (‘어쩔 수 없는’에 가까운) 매각 경험이니 출판물로 남기는 게 부담스러웠을 것.

그러니 애플, 나이키, 넷플릭스 같은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경영자의 경영담만 하드커버지에 쌓인채 팔리는 게 아닌가 싶고.

내 15년 직장생활보다 훨씬 더 실전 압축 경영 경험을 했을 저자한테 한 수 배우기엔. 책 한 권 가격은 너무 싸다.


얼마 전 투자자 정장환 님(전 아쇼카 한국 부대표)과 이야기 하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생을 바꾸는 세 가지 방 법이 있는데 첫 번째는 우주에 나가는 것, 두 번째는 죽음을 앞두는 것, 세 번째는 대표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사업자등록증에 내 이름이 박힌 채 일한다는 것은, 우주와 죽음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경험이라는 것이다.

책의 비유는 호들갑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 인격을 가진 법인을 세우고 거기 대표가 되는 건 실은 대단한 일이 맞다.

한 아이를 물리적으로 낳고 인격을 성장시키는 일에 감히 비견할 만하다.

이 시절, <모노클>에 대한 벤치마킹을 적극적으로 했음. 2015년 프랑크푸르트 북페어를 직접 다녀왔는데, 〈모노클> 공동창업자 두 명이 나와서 이야기하는 세션이 있었음.

인상적이었던 점은 자신들을 ‘종이 잡지’ 또는 ‘미디어’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이 선망하는 ‘브랜드’로 포지셔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었음.

브랜딩 전략의 일환으로 <모노클>은 전 세계 도시를 돌아다니며 고객들을 직접 만나는 오프라인 이벤트를 진행했음. 이 행사에 참여하려면 적지 않은 비용을 내야함. 하지만 ‘<모노클> 을 읽는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상징성이 있었음.

“너도 〈모노클> 읽어? 나도 읽어”라는.

<모노클> 이벤트에 오는 사람이라면 네트워킹할 가치가 있다는 인식.

트레바리가 벤치마킹할 법한 대상이네. 판매하는 제품의 물성은 종이 잡지지만. 자기네한테 소비자가 진짜 뭘 바라는지 알고 있는 것.

요즘 말로 ‘텍스트 힙’이라는, 힙한 이미지를 사고 싶은 사람이 자기 고객이란 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태도에 있다고 생각함.

똑똑하고, 겸손하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 이들 덕분에, 내가 어떤 사람과 일하고 싶은지를 귀납적으로 깨닫게 됨.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들과의 관계에는 각각 ‘사람, 돈, 미션’ 이라는 주제가 밑바탕에 있었음. 그리고 이 세 가지는 결국 사업의 전부이기도 함.

긴 시간 폭풍우를 버티면서도 사람과 돈, 미션에 대한 서로의 가치관을 확인하며 지지해주었고, 그래서 끝을 함께하는 것도 가능했음.

스타트업. 말은 멋지지. 지금은 올드해진 벤처라는 단어도 20년 전엔 멋졌다.

농공단지 제조 기반 좋좋소와 스타트업의 차이는 뭘까. 적어도 강남, 판교, 구로 같은 도심지 오피스로 출근해 CNC 대신 PC를 만질 걸로 예상한다는 것 정도.

이런 곳에 창업자 무리를 제외하고 어떻게 비싼 인력을 데려 올 수 있나? 전문성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이미 갖춰진 전문성을 시장에서 사려면 비싸다.

결국은 태도를 볼 수 밖에 없다. 하나씩 채용과 구직 조건을 쌍방에서 현실화하다보면, 사실상 스타트업 채용에선 태도라는 조건이 전부일지도.

찰리 멍거는 젊은이들에게 커리어에 대한 세 가지 조언을 한다.

자신이 사지 않을 것은 팔지 않는다.

존경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사람 밑에서 일하지 않는다.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들하고만 일한다.

이 중 두 번째 조언을 읽고 나서, 나에게 중요한 동업자의 요건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문장으로 정리된다는 것을 알았다.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는 가치관, 능력, 태도 등 다양하지만,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둘 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하는가이다.

존경심의 기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높아지고, 그 기준 에 미치지 못하는 순간 마음이 식는 건 금방이다.

뻔한 소리, 고매한 소리라고 들릴 수 있는데. 결국 장기적으로 성공하거나 성장할 수 있는가는 그런 뻔한 소리를 지켜나가느냐에 있다.

달리 말하면 대단한 비밀 팁 따위는 없다는 것.

매출이나 영업이익 같은 재무적 목표보다 ‘유료 구독자 수’가 Kp로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이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i) 콘텐츠 공급자인 저자 섭외력 및 협상력이 커지고,

iI) 구독자의 콘텐츠 소비 데이터를 기반으로 잘 팔릴 콘텐츠를 기획할 가능성이 높아지며,

it) 그 결과 매출과 영업이익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음.

사업의 플라이 휠을 그려볼 때 첫 단추는 유료 구독자 수였고, 이는 같은 콘텐츠 정기구독 사업인 넷플릭스를 벤치마킹한 결과이기도 했음.

유료 구독자 수를 늘리기 위해 고객을 가능한 한 깊이 파악하고자, 고객 인터뷰를 진행했음. 전담 TFT를 만들어 100명 넘는 유료 고객과 일대일 집중 인터뷰도 하고, 매주 몇 명의 고객을 사무실로 초대해 인터뷰를 진행한 후 이를 기록하여 팀과 공유하는 프랙티스를 만들었음.

1.

생산자 우위가 아니라 소비자 우위 시장이다. 대체제가 넘쳐난다면 소비자 눈에 잘 띄어야 한다.

소비자가 뭘 원하는지. 우리 제품을 어떻게 발견하고, 인지하고, 왜 선택하고, 왜 계속쓰거나 안 쓰는지. 그 이유를 알면 된다. 맵핵을 켜는 것과 같다.

2.

플라이 휠 개념을 우리 비즈니스에서도 도입할 수 있나? 단순히 ‘단가 * 판매량’ 구도가 아니라. 지금 시점에서 제1의 KPI로 꼽을 지표가 있나? 이를 통해 사업에 가속이 붙을.

당장 떠오르는 건 고객 섹터별 레퍼런스 확보… 좀 더 고민 필요.

피터 드러커가 제시하는 벤처 기업의 성공 원칙 네 가지 중 첫 번째는 ‘시장에 초점을 맞추어라’다.

벤처 기업이 성공을 거두는 것은 대부분 예상치 못했던 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고객이 예상치 못한 용도로 구매할 때이므로, 이런 것을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상치 못한 이벤트가 발생하면, 분명한 기회로 인식해서 체계적으로 관찰하라고 강조한다.

WD-40도 원래 항공우주 산업에서 부식 방지와 수분제거 용도로 쓰이는거라는데. 소비자에겐 오히려 원 목적이 낯설 정도.

내가 고객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고객이 어떻게 쓰는지 추적할 것.

이나모리 가즈오는 전시 상황을 겪은 기업들을 살려낸 생 생한 경험이 있었기에, 왜 리더인가에서 이렇게 적는다.

정말 간절하게 해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례하고 난폭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과감하게 일의 한복판에 뛰어들어야 한다.

나는 느슨하고 헐거운 마음가짐으로 문제의 뒤로 물러나 좋은 사람인 척하는 리더보다 가끔은 미치광이 소리를 듣더라도 무소처럼 일의 정면으로 달려들어 일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리더를 훨씬 신뢰한다.

우리는 일 앞에서 좀 더 난폭해져도 된다. 아니, 리더라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당신의 일을 당신 대신 해결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경영자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위치에 선 사람이다. 그러므로 리더에게 쓸데없는 마음의 여유 따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일을 책임지는 사람.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 사람. 가장 크게 좃되는 사람이 담당자다. 그래서 회사의 최종 담당자는 대표이사고.

반면 정기구독 사업은 첫 결제보다 재결제를 유도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문제였음. 이 시기 정기구독 사업의 주 고객은 남보다 한발 앞서 새로운 트렌드나 정보를 습득하고자 하는 사람들, 특히 마케팅 및 브랜딩 업무를 하는 분들이 많았음.

하지만 고객이 첫 결제만 하고 재결제를 취소하면 밑 빠진 독 에 물 붓는 것과 마찬가지였음. 매달 내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갈 때마다 고객은 ‘이 서비스가 지난 한 달간 이 돈만큼의 가치가 있었나?’를 상기함.

매월 결제일마다 고객의 냉정한 판단을 받는 저울 위에 올라와 있었기에 어떤 콘텐츠가 첫 결제를 유도하는지, 어떤 콘텐츠 때문에 고객이 재결제하는지 데이터를 뜯어보고 파고들어 사업에 필요한 콘텐츠의 성격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였음.

응원하고 지지하는 마음에 기대던 시기는 끝나고, 아차하면 재결제가 끊기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이었음. 본격적인 ‘사업’의 시간이 시작된 것임.

구독모델이 널리 쓰여 합리적인 듯 하지만, 또 제공자 입장에서 그 나름의 고충이 있다. 소비자도 일회성 결제에 비해 매달 재결제하는게 맞는지 정기적으로 고심하게 된다.

모든 관계에서 핵심은 ‘기대 관리 expectation management’라고 생각한다.

마음의 합이 잘 맞아 자연스럽게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은 드물다. 서로가 기대하는 바를 명확히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을 때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 같다.

가족 안에서도, 팀 프로젝트 에서도,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하물며 큰돈이 걸린 주주와의 관계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되돌아보면, 나는 두 가지 문장을 말하는 데 매우 인색했다.

하나는 “무엇을 원하시나요? 저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나 요?”이고, 다른 하나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 도와주세요”다.

첫 번째 문장을 많이 썼더라면 주주와 기대치를 조율할 수 있었을 것이고, 두 번째 문장을 많이 썼더라면 주주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들을 빠르게 배웠을 것이다.

모르면 물어라, 혹시나 싶어도 물어라.

물론 많이 물어보면 내 전문성도 신뢰도도 떨어지고 귀찮은 놈이 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파국으로 치닫는 것보단 멍청하고 아둔하고 답답한 사람이 되는 게 낮다.

그것도 일종의 기대치 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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