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문 – ‘작가들의 연애편지’ 中, 홍성식 시인의 ‘나, 아직도 너의 향기를 잊지 않았다’
<전략>
기억하니? 그해 겨울 우리가 함께 떠난 바다
“산으로 가는 과 엠티가 싫다”는, “탁 트인 바다가 좋다”는 너를 위해 나는 ‘보디가드’를 자처했었다
며칠 빼먹을 강의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연했다
너는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줘야 할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으니까
그리고 꿈같은 바다에서의 낮 시간이 지나고 밤이 깊어갈 무렵
맥주 두어 잔에 취한 네가 “밤바다 파도 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다.
상기된 뺨이 붉던 너를 따라나서며, 나는 외투 안주머니에 서슬 푸른 과도를 신문지에 말아 숨겼다.
너를 슬프게 하거나 아프게 하는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만약 너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세상 전부를 상대로 싸울 자신도 있었다.
다행히, 겨울 밤바다는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고, 깨어난 다음날 아침 햇살 아래에서 여자의 얼굴은 에메랄드보다 밝게 빛난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밤새 너의 손을 잡고 있던 내 손아귀에는 촉촉하게 땀이 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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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연애편지도 어쩜 이리 작품으로 쓸까 싶다
그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의 가장 좋아하는 대목
세 쪽 반짜리 작품을 모두 올리기엔 부담스러운 것 같아 일부만 발췌했다.
주인공이 서슬 푸른 과도를 신문지에 말아 넣을때 내 손아귀도 불끈!
있지도 않은 과도를 움켜쥐듯…
세상 전부를 상대로 싸울 자신.
이건 논리를 넘어 선 확신이다.
그 순간 그녀는 종교다.
연애편지는 나 역시 자신있는데, 문제는 내 연애편지 작성능력은 항상 63빌딩 너머로 차였을때만 발휘된다는 것이다.
언어영역을 관장하는 좌뇌의 어떤 부분이 피학적인 자극에만 활성화되는게 분명해.
어떻게 보면 그건 연애편지가 아닌 하소연 능력이 뛰어난 건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미 국방성의 기밀자료 보존기간이 풀리는 것처럼 내 연애편지도 기밀이 풀리면 책으로 엮어내 보리라
너를 위해 세상을 상대로 싸우겠다던 청년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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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만에 만난 우리는 거리에 서서 단 하나의 질문만을 서로에게 던지고는 가던 길을 갔다.
서로에게 진정 묻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을 텐데.
그날 밤 돌아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아직도 여위고 맑은 살갗과 팔목을 가진 그녀를 보니 한때나마 목숨 걸어 그녀를 사랑한게 자랑스럽다”고. 너는 그 밤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것을 떠올렸을까.
너를 본 며칠 후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연락처를 알아내 너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맨정신에는 도저히 못할 것 같아 술을 엉망으로 들이켠 후였다.
남편이 받았던 것 같고, 나는 취기가 불러준 용기가 있었음에도
“내가 H를 당신보다 훨씬 더 좋아한 사람이오”란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충혈된 눈을 손등으로 누르며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찢었을 뿐이었다.
……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