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권함, 남덕현

작가의 말을 오롯이 내 식으로 소화하진 못했다. 다만 언젠가 몸에 좋게 쓰일 것 같아 찬장에 고이 넣어두는 심정으로 기록해둔다.

밑도 끝도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한 것들만 진화한다. 그래서 진화하는 것들은 절대 강하지 않다. 진화하지 않는 슬픔이란 밑도 끝도 없이 견디고 또 견디는 슬픔이다. 끝끝내 견디는 인간의 슬픔은 결고 진화하지 않는다. 그런 슬픔은 강하며, 그런 슬픔만이 세상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전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슬픔을 건너뛴 세상의 모든 의지는 죄다 헛꽃이다. 슬픔 속에서 모든 의지를 상실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의지가 생겨난다면 그 의지야말로 불굴의 의지다.

어설픈 희망과 기쁨보다는 차라리 절절한 슬픔과 절망이 고단한 삶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시대가 잔인한 이유는 밑도 끝도 없이 슬프고 절망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이리라. 늘 밝은 의지와 의욕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을 강요하는 시대의 야만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가.

나는 슬플 때 가장 착하고, 슬플 때 가장 명징하며, 슬플 때 가장 전복적이다. 내가 슬픔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하는 이유이며, 이 책은 그 명령에 따른 흔적이다.

지극한 사람을 잃으면 깊고 치명적인 내상을 입는다. 통증은 여기가 바닥이다 싶으면 언제나 한 층을 더 뚫고 내려가는 법이니, 통증의 집요함과 지구력에 놀라지 말거라. 그저 그러려니 했으면 좋겠다. 익숙해지면 언젠가는 개 짖는 소리에 맞춰 신음 소리를 내며 앓게 된다. 내 보기엔 그게 어른이다.

냉장고 묵은 음식은 다 버렸고 구석구석 쓸고 닦았다. 쌀 새로 사다 놓았으니 그놈부터 헐어 먹어라. 먹던 쌀은 눅눅해서 베란다에 신문지 깔고 펼쳐 놓았다. 혹시 쌀벌레가 기어 다닌다고 공연히 죽이지 말거라. 때가 되면 쌀 밖으로 기어 나와 번데기 되고 나방 되어 날아간다. 사람이 슬픔을 날려 보내는 이치도 크게 다르기야 하겠느냐. 볕 좋은 날, 베란다에 나가 쌀 고르는 슬픔은 참 좋다. 시간이 훌쩍 갈 게다.

내상은 이제 바닥까지 왔구나 싶을 때 여지없이 그 바닥을 뚫고 하강하는 법, 언제나 농익은 담처럼 혼탁하게 혈류를 타고 돈다. 만약 ‘쿵’하고 속에서 소리 들리면, 상처가 바닥에 닿는 소리구나 여기지 말고, 아 상처가 바닥을 뚫고 더 깊이 스며드는구나 생각하여라. 그렇게 깊어져 너의 오감에서 멀어지면 너의 인식에서 벗어나고, 결국 너의 의지에서 벗어나리니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상처임을 알았을 때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 때가 되어야 한다. 안달복달 마라. 아니, 하려면 해라. 달라지는 건 타는 마음 더 타는 것 밖에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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