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다 만 신 3. 요즘 대세인 ‘나쁜 남자’ 예수, 알라

사람들은 왜 종교를 가지는가? 혹은 왜 종교를 만들었는가?
종교인 입장에서 이 질문은 선후관계가 뒤바뀐 걸로 보일 듯.
신이 먼저 나고 인간을 만들었으니, 종교(신)가 먼저 존재한 후 인간이 어떻게 신의 존재를 알아가는 가의 형상이 되어야겠지.

아직은 비종교인인 내가 정의하는 종교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서비스업’
인류는 글이 생기기 이전부터 벽에 그림이나 표식을 그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연현상을 신이라는 존재로 형상화했고, 그걸 숭상하는 제사를 지내며 무지에서 나온 공포에서 벋어나 위안을 얻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의 핵심 단어 두 가지.
‘위안’과 ‘책임전가’
인간이 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얻는 게 위안이다.
이게 종교가 주는 위안의 핵심 작동기제.
애초에 불완전한 인간, 거기에 기독교의 경우 원죄까지 지었어.
난 애초에 이따위 녀석!
하지만 이런 고통도 슬픔도, 가끔가다 얻는 기쁨마저도 사실은 주의 뜻!
내 생활에 대한 모든 결과는 주의 뜻이며 나는 그에 따를 뿐. 주님의 ‘종’이라는 건 기독교에서 전혀 부정적인 뜻이 아니지.
자유의지를 버리는 대신 책임소재에 대한 면죄부를 받는 거지.

거칠고 제멋대로지만 강력하게 나를 이끄는 ‘나쁜남자’에게 끌리는 여자의 맘이랄까?
나의 계획과 실천 모든 게 불완전해(예를 들어, 점심 식사로 어느 집이 괜찮을지 그 메뉴가 오늘도 먹을만 할지 주차할 곳은 있을지 등등),
하지만 이 모든 걸 자신만만해 보이는 저 남자에게 맡긴다면 난 방황할 필요 없어.
‘난 그냥 그의 뜻대로 따라 가고파아~~ ‘
이렇게 하면 적어도 스스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단 거지.
물론 그 남자를 선택한 최초의 책임은 져야하겠지만, 그건 자기가 따르던 나쁜 남자의 환상에서 깨어났을 때 이야기고.

예수나 알라는 나의 자유의지를 담보하는 대신 책임을 면제하시고 그 분이 이르는대로 따르면 될 것 같은 위안 주시는, ‘나쁜남자야~♫’

* 덧붙이는 훈련소 경험
훈련소의 주말 종교행사는 고달픈 군 생활에 얼마나 큰 위안인가.
초코파이나 콜라 같은 물질적 위안은 물론이고 각 종교 교리나 찬송가 등이 정서적으로도 큰 위안이 되는게 사실이다.
훈련소 동기 중 한 명은 그 길로 교회 신도가 됐다.
나도 똑같이 논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건만…
세례 기념으로 준 자유시간 1개, 소보루 빵 1개, 펩시 트위스트 콜라 1캔 등을 주님의 은총으로 여기며 그 자리에서 다 소화시켜 버렸지.

“만들다 만 신 3. 요즘 대세인 ‘나쁜 남자’ 예수, 알라”에 대한 1개의 생각

  1. 무교인 둘이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니 결국은 어떤 지점으로 수렴하는 것 같네. 네 꼬리의 처음 부분을 제외하고는 읽으면서 계속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
    도구 이론에 굳이 집착하는건 아닌데, 종교라는 도구가 줄 수 있는 이익이 그 어떤 도구보다 막강할 수 있거든.
    영생을 준다. 먹고 싸고 자고 입는 문제가 천국이란 곳에서 영원히 해결된다. 이 만큼 강력한 유인이 있을까? 내세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악마의 군대가 내려오면 일단 우리는 구해준댔는데 이만큼 강력한 보험, 든든한 지원군이 있을까? 너는 약간의 위안거리라 했지만 사실은 다른 웬만한 도구가 줄 수 없는 엄청난 위안거리가 아닌가 해.

    너무 생각에만 빠져 드는 건 조심해야겠지만 아직 내가 그정도까지 들어갔단 느낌은 안 들거든. 겨우 파도에 발 적시고 있는데 위험하니 나오라는 소리를 듣는 기분. 물론 그러다가 집채만한 파도가 한 번에 쓸어갈 수도 있지만.

    이단(?) 교회 사람들이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충족 이론 위에 7단계 이론이란게 발표됐다고 하더라. 정확한 변동사항은 모르겠는데 여튼 그 최종단계에 영적 자아 실현단계래. 먹고 싸고 자고 입고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된 후에야 찾을 수 있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욕구가 종교의 욕구일지도 몰라.

    원시 인류가 사냥감으로 제사지내던 시절과 유일신이 등장한 후 2000년이 지난 지금의 종교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되 그 형식은 싹과 고목처럼 차이가 있겠지. 원시시대 종교욕구가 어쨋든 살고싶은 낮은단계의 욕구충족을 위함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만난 종교인들 말마따나 7단계쯤 되는 초 고차원적 욕구실현의 (그들이 믿는) 유일한 방편이지.

    요즘 신영복 교수의 ‘강의’라는 책을 읽거든.
    거기 보면 ‘서양은 존재론이고 동양은 관계론’ 이라는 말이 나와.
    네가 말 한 헤겔 아저씨는 홀로 골똘히 ‘나는 왜 존재하는가, 중력은 왜 존재하는가’를 생각했다면, 공자 맹자 형님들은 ‘나는 세상과 어찌 어울려야 하는가, 중력은 세상 만물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를 생각한다는 거지.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도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존재론에서 사람들이 왜 종교를 갖는가? 의 관계론으로 변해가는 과정인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유신론자가 담론에 끼었으면 훨씬 더 좋았을것 같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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