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상은 누가 옮겼나?

요즘 신영복 교수의‘나의 동양고전독법 강의’를 읽으면서 이것저것 생각해보게 된다.



아래는 책의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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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깍듯이 예우합니다. 노인이 타면 얼른 일어나 자리로 안내하고, 노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다 미처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꾸중을 듣는다고 합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들려준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이 지하철을 저 노인들이 만들지 않았느냐!”


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한 젊은이한테 물어보았지요. 물론 잘 아는 젊은이였지요. 이 지하철을 만든 이가 바로 저 노인들인데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들의 답변 또한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어요.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




– 나의 동양고전독법 강의 241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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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을 읽으며 번쩍하고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엄보라가 서울에서 방과 후 교실 강사하던 시절에 들은 동료 남자강사 이야기.


수업을 위해 책상을 교실 한 쪽으로 밀어야 하는데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이라 힘에 부칠까 싶어 남자 강사가 책상을 함께 밀어주고 있었다.


그걸 보고 한 아이가 옆에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야, 어차피 저 사람 우리 엄마한테 돈 받아서 일하는거야”


(보라돌아, 혹시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다오)




‘한 겨울에 걸인이 얼어 죽어도 그건 우리 모두의 책임’ 이라던, 연대와 반 자본, 민족 민중을 부르짖던 당신들 386세대가 기르는 아이 아닙니까!


앞서 이야기에 나오는 지하철 청년은 이미 사회에서 나와 함께 경쟁하고 협력해야 할 동료.


지하철 청년과 초등학생, 그리고 ‘돈이 최고의 가치’라 하던 후배가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이들과 나는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가.




이건 기성세대의 세태 한탄이나 아랫세대의 버르장머리 없음에 혀를 내두르는 넋두리가 아니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내 삶의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에 진정 승리했는가?


초등학생의 책상을 옮긴 것은, 강사의 호의인가 학부모의 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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