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68, 일본 69, 그리고 한국의 70

한 4년 쯤 전이다.
하도 하루키 하루키 하길래 ‘상실의 시대(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더 멋있다)’부터 댄스댄스댄스… 뭐 지금은 제목도 잘 기억 안 나는 일본작가 작품들을 연달아 읽었더랬다.
요시모토 바나나도 있었던 것 같고. 제목은 키친이었나?
여튼, 그러다가 하루키의 ‘69’ 라는 책을 읽었는데 여지없이 재밌더군.
확실히 하루키는 두꺼운 책장을 가볍게 만드는 재주가 비상하다. 술술 넘어가게 하지.

그 후에 전태일 평전을 읽었는지, 아니면 전태일 평전을 먼저 읽고 69를 읽었는지…
아! 아마 전태일 평전을 훨씬 전에 읽었던 것 같다. 전태일은 군에 가기 전에 본 것 같네.
여튼저튼 그 두 책이 읽은 순서에 관계없이 저절로 연결되더라.


일본의 69년, 한국의 70년
동시대에 다른 장소
각각 어떻게 달랐나?
뭐가 그 차이를 만들었나?

일본의 69년도 스무 살은 대학생이 되어 바리케이트 안에서 유쾌한 반란을 꿈꾸고
한국의 70년도 스무 살은 노동자가 되어 시장바닥 앞에서 처절한 분신을 감행한다.

그리고 한참 뒤늦게 토막 글들로 접하게 된 프랑스 젊은이들의 68혁명.

유렵의 68년
일본의 69년
한국의 70년은 어떻게 다른가?
실상 유럽과 일본의 60, 70년대를 하나로 묶고 한국의 60, 70년대와 비교하는게 옳지 않나 싶다.

반납기한을 넘겨버린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를 작은누나 편에 돌려주며 꼭 글로 남겨야지 싶었다.
‘하루키의 69 대 전태일의 70’ 이라는 생각거리에 동경대 전공투라는 녀석이 가세한 셈.
이 책은 동경대를 점거한 학생운동 단체 ‘전공투’가 20세기 일본의 가장 뛰어난 소설가이자 지식인(책의 소개)이라는 ‘미시마 유키오’를 끝장 토론에 초대해 강당에서 벌이는 설전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정말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굳이 비유하자면 서울대 학생회와 이문열(혹은 복거일)의 끝장토론 정도인 셈.
어쨌든 얘들이 1 대 몇 백으로 벌이는 토론의 주제가 21세기 평범한 학사 학위자의 상상을 불허한다.
자아와 육체, 타자의 존재란, 지속과 관계 맺기의 논리, 사물과 말과 예술의 세계… 이런게 책의 목차이며 토론의 소주제들이다.
상대에게 유식한 척 하면서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고 싶은 글귀를 찾을때 최고의 지침서가 될 것 같다.

‘만들다 만 신’ 이란 제목으로 창환이랑 종교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너무 ‘관념적으로 빠져드는 것의 위험함’에 대해서 나왔는데, 얘들은 완전 관념의 끝판대장이다.
허나 그게 부럽다.
프랑스의 68, 일본의 69년은 그런 고도의 사유가 가능했건만.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었건만.
우리의 70년은 근로기준법 준수, 배라도 채우는 돼지가 되기 위해 몸에 신나를 뿌려야했다.
소크라테스도 뇌에 탄수화물이 공급되지 않고선 사유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거대한 배와 거대용량의 메모리와 거대한 건물 외에,
그 안을 채울 공상과 상상과 망상과 사유를 생산하려 한 적이 있는가.
혹은 그럴 여유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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