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도 없고, 심판도 없는 춤. 그래서 더 무섭게 경계해야 한다.

살사 댄스는 자기가 잘 춘다고 착각하기 쉽다. 객관적으로 기록하기 어렵고, 서로 춤에 대한 지적은 안 하는게 예의다 보니. 그럭저럭 동호회 생활을 이어나가다 보면 으레 ‘내가 꽤 잘 추는구나’ 싶어진다.

그런데 역도는 착각할 틈이 없다. 기록이 전부니까.

내가 들어올린 100kg이 라이벌의 100kg보다 값지다고 스스로 의미부여할 수는 있겠지만, 100kg은 100kg이다.

누가 더 많이 들었는지가 끝. 누구도 결과를 부인할 수는 없다. 저 체육관과 이 체육관은 중력이 다르게 작용한다고 뻘소릴 할텐가. 그 시간에 1kg이라도 더 들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살사를 오래 추다 보니, 자기 객관화가 흐려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니, 말 바로 하자. 바로 내 이야기다.

“내가 쟤보단 잘 추는데… 지금 좀만 하면 다시 올라오지.”
“요즘 내가 바빠서 덜 춰서 그렇지, 원래는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렇게 내심 스스로를 올려치는 일이 많았다.

한국 사회 전체가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적어도 사교춤에서는 겸손이 필수다. 자신감 있게 추는 것과 자만은 다르다.

자만하는 순간, 배움의 기회가 사라진다. 이미 잘 춘다 생각하면, 딱히 어디 가서 배워야 할 필요를 못 느낀다. 한 예로, 나보다 늦게 시작한 사람이 강사가 되면 괜히 그 수업 들어가는 게 꺼려지기도 한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결국 배워서 좋은 것도 나고 안 배워서 손해인 것도 나다. 스스로를 위해 뭐가 현명한건지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짝춤의 특성상 내가 옳다 확신하면 춤이 거칠어지기 쉽다. 설령 기술적으로 내가 맞더라도 상대와 맞춰가며 춰야 사교 춤이다. 아예 엘리트 스포츠인 댄스스포츠라면 다르겠지만, 사교를 위한 춤은 기술적으로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보다 더 사교적이느냐를 따져야 한다.

좀 극단적으로는 설혹 리드와 팔로우가 엉망이더라도 둘이 즐겁게 한 곡 췄으면 된거다. 반대로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상대가 상처 입고 재수없게 생각하면 그게 옳게 된 사교춤인가.

춤 실력이 늘어야지, 자의식만 늘어선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역도는 밸런스를 잘 맞춰주는 취미. 내가 아무리 힘이 세져도 그 이상의 중량이 준비돼 있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조차 체육관에 있는 전체 플레이트를 꽂은 바벨을 들어올릴수는 없을 것.

역도에선 100가지 1000가지 변명이 필요없다. 그래서 Personal Record가 얼마냐. 여기에 딱 세자리 숫자로만 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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