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루지

진화심리학을 다룬 책은 비슷비슷한 듯. 아직 신생 학문이라 당연한 걸지도. 아직 이 분야 바이블은 ‘생각에 관한 생각’이 아닐까. 그래도 인상 깊은 구절 몇 개 옮겨 적어 본다.

참, 클루지를 한국 말로 옮기면, 주먹구구 정도가 아닐런지. 회사 일도 세상 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되게 주먹구구인 면이 있는데. 그래도 멀쩡히 돌아간다. 인간의 정신도 어쨌건 잘 돌아가고는 있지만(인류가 멸종하진 않았으니). 그게 제대로 된 설계에 의해 최상으로 구현된 게 아니니 한계를 인정하고 잘 뜯어 고치며 살자. 이런 의도로 클루지란 제목을 지은게 아닐까 싶음.

조상 남성들 가운데서 잠재 배우자의 신호를 과잉 해석하는 남성들은 조심스러워 기회를 놓치곤 했던 남성들보다 더 많은 생식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조상 남성들이 과잉 해석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더 많은 생식 기회를 얻는 것이 간혹 있지도 않은 기회를 잘못 자각해 자존심이나 체면을 구기는 것 같은 부작용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컷들이 대개 무모하거나 뻔뻔할 수준으로 자신감 있는 건, 그렇게 해야 번식이 가능했기 때문. 초식남은 진화 관점에서는 당연히 도태되는게 아닐까. 한 명의 초식남이라는 특정 개체는 결혼하고 번식할 수 있을지 몰라도. 초식남 특성의 그런 유형 전반은 대개 번식이 어렵겠지.

우리의 기억은 맥락과 빈도와 최근도의 함수

그 기억이 떠오를 만한 상황인가, 자주 떠올렸는가, 최근에 떠올렸는가. 빈도와 최신성은 직관적인데. 맥락은 새로웠다. 입력 상황과 동일한 상황에서 출력이 잘 된다니.

우리는 흔히 자기가 이전에 설거지한 일은 잘 기억하면서 상대방이 설거지한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쨌든 우리의 기억은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의 경험에 초점이 맞춰지도록 조직된다……여러 연구에 따르면 집안일을 함께 하기이든 학술논문의 공동 집필이든 거의 모든 협동 작업에서 주관적으로 지각된 각 개인의 공헌의 합은 실제로 수행된 작업의 총량을 초과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한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 자기가 한 일은 잘 기억한다.

‘내가 더 힘들다, 내가 더 열심히했다’는 류의 감정은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본인 위주로 편향된단 걸 과학적으로(즉, 재현가능한 보편타당에 가까운 수준이란 걸) 일러준다.

놀라운 것은 극성 시청자들이 텔레비전을 조금만 보는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덜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텔레비전 시청이 단기적으로 몇몇 이익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뭔가 다른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날려버린 셈이다.

인터넷 중독과 같이 좀 더 현대적인 강박 충동이 또 다른 예다. 이 강박 충동은 아마도 우리가 정보를 얻을 때 조상 전래의 회로가 보상을 주면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이런 정보 조각 하나하나가 내게 쾌감을 선사한다.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영화 비평가도 아니다. 때문에 이런 정보가 내게 쓸모 있게 될 개연성은 그리 크지 않다. 그래도 나는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그냥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좋아한다. 내 뇌는 나를 좀 더 까다롭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정교하게 배선되어 있지 않다.

뭔가 살아남기 위한 단서를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 센서를 켜고 있는 선조가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다. 그러니 단편적인 정보 습득에 쾌감을 느끼고 인터넷 서핑에 중독되는 건 진화에 따라 당연하다는 것.

진화란, 마치 뛰어난 공학자가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처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진화해온 것들을 바탕으로 당장 그런대로 쓸 만한 해결책이 발견되면, 그것이 선택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불완전하고 때때로 엉뚱한 문제를 야기하는, 곧 클루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클루지인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한 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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