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오닉5 PE(상품성 개선모델, 흔히 말하는 페이스리프트)를 2024년 5월 31일에 받아, 반년간 약 1만 킬로를 주행했다.
전기차는 내연기관과 경쟁하는 동력원이 아니다. 세대가 바뀌는 동안 잠깐 이전 세대와 공존하는 차세대 동력원이다. 이 생각은 구매할 때부터 1만킬로 주행한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마차에서 자동차로 넘어가고, 기차도 석탄에서 디젤, 다시 전기로 넘어가듯. 결국 에너지 효율과 활용이 좋은 쪽으로 넘어가는게 당연지사다.
지금 시점에서 1만 킬로를 달리며 겪은 장단점을 정리해 본다.
충전? 괜찮은데 몇몇 빡치는 점이 있음
Good
한국은 세계에서도 손꼽히게 전기차 충전 인프라가 잘 구축된 나라다. 전기차 사용자는 실제 체감할 수 있는데. 어지간한 곳에 충전기가 다 있다. 덕분에 집과 직장에 충전기가 없어도 전기차 모는 게 어렵지 않다는 게 내 결론.
한때는 나도 전기차 충전소 있는 아파트 안 살면 전기차 못 사는 거 아닐까 생각했는데. 주말 손세차하는 정성의 4분의 1만 들여도 충분하다. 1~2주에 한번 근처 급속 충전소가서 20분 충전하면서 커피 한 잔 마시면 끝.
지금 우리 오피스텔 전기 충전소가 모두 폐쇄돼 심적으로 짜증은 나지만 딱히 불편을 못 느낀다. 도시 생활 동선에선 전기차 충전기가 없는 주차장을 만나는게 더 어렵다.
Bad
그럼에도 충전 스트레스가 완전히 없는 건 아니니. 충전기 퀄리티 때문인지 뭔지 아무리 꽂아도 충전이 안 되는 충전기기 왕왕 있다. 경험상 10번 중 1번?
이 때 더 빡치는 건, 정확한 오류 원인을 안 알려주는 것. 충전기 문제인지, 내 차의 문제인지 모르고 그냥 충전이 안 된다는 메시지만 뜨고 끝나거나 혹은 그냥 충전끝이란 메시지만 뜨고 끝나버린다.
이런 문제는 영세 브랜드 충전기뿐 아니라 불필요하게 화려해보이는 이핏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원인 찾기는 빨리 포기하고 옆 충전기를 찾는 게 현명하다.
또 하나, 명절이나 연휴 고속도로 충전소에서 자리가 없을때 애매한데. 어차피 이런 시즌엔 내연기관차도 주유기 앞에 길게 늘어선다. 나 역시 주유소에서 10분 이상 기다린 적이 있으니.
문제는, 전기차 충전소는 주유소와 달리 누가 우선인지 분명히 구분되는 줄 서기가 어렵다. 또 언제 끝나는지 가늠하기도 애매하다. 이건 기술 문제라기 보다는 충전소 구획의 구조 문제이자 충전 문화 문제다.
이미 50년 이상된 주유소의 구조와 문화는 나름의 최적화가 된 것. 충전소에도 주유소처럼 차량 교통정리하는 인원을 배치하면 해결되겠지만, 돈 안 되는 전기차 충전소에 사람 배치하는 건 어불성설이겠지. 바닥에 적절한 대기 구획을 그리는 게 맞을 듯.
주행거리? 공인 400킬로면 땅끝마을까지 가능
한국의 인증 주행거리가 워낙 짜다보니, 공인 400킬로대인 차는 완충하면 500킬로는 무조건 찍힌다.
아이오닉5 4륜도 인증은 약 450킬로. 완충하면 당연히 500킬로 이상 계기판에 찍히고. 이건 한반도 전역을 충전없이 커버할 수 있는 거리다.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주행거리가 높을 수록 좋은 건 맞는데. 배터리 기술의 발전없이 단순히 배터리를 많이 적재하는 방식으로 주행거리를 늘리면 무게와 가격이 올라가 잃는게 너무 많아 진다.
현 시점 공인 400킬로 이상 나오면 합격점 아닐까 싶음. 앞으로도 주행거리는 점진적으로 개선되겠지만, 충전이 쉽고 빠르다면 굳이 주행거리에 목맬 필요가 없기도 하고. 내연기관 차량 평가할때 연료통이 45리터냐 50리터냐 따지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터지는 토크, 넘치는 힘이 주는 평온함
전기차 특성상 토크가 초반부터 터지고, 듀얼모터 합산 320마력이라 시속 140 정도까지 가속도 시원하다.
물론 전에 타던 i30나 k5 같은 내연차도 가속 페달을 깊이 밟으면 초반에 강하게 밀어줄 수 있고 140킬로까지 밀고 나가겠지만. 할 수 있다와 쉽게 한다에서 오는 편안함의 차이가 크다.
주행의 즐거움은 어디서 올까? 가장 기본적인 건 내가 조작하는 대로 차가 움직인다는 느낌. 즉 재빠른 피드백에서 올텐데. 이 관점에서 전기차는 내연기관 보다 구조상 유리하다.
내연기관과 달리 고알피엠을 쓸 필요가 없고 반응도 훨씬 즉각적이다. 심지어 10년도 더 전에 탔던 레이 전기차조차 재밌었다. 박스 카트를 타는 느낌. 하물며 그로부터 10년 지난 지금 아이오닉5는 말해 뭘할까.
강원도 1100고지, 인터스텔라와 테넷 촬영지로 유명한 성남 언덕(물론 사실 아님) 등을 갈때도 전혀 부담없이 즐거운 맘으로 떠날 수 있는게 전기차의 장점이다.
K5를 포함한 중형 세단은 덩치에 비해 힘이 부족해, 4~5명 태우고 저런 경사진 어딘가로 여행하면 운전에 부담 가는게 사실.
물론 그렇다고 K5가 언덕을 못 오르냐? 당연히 아니다. 20년 전 우리 아버지 1.4리터 에스페로가 아닌 이상 요즘 차는 엑셀 밟으면 다 올라간다. 시끄럽고 힘들게 올라가는게 문제지.
(참고로 아버지 에스페로는 고갯길 넘을때 계속 2단과 3단을 번갈아 변속해야 했다.)
이렇게 ‘갈 수는 있다’와 ‘편하게 갈 수 있다’ 차이가 크고. 여기서 오는 만족감이 든든하다. 이 차로는 국내 어느 여행지건 무리 없이 갈 수 있다는 여유.
(여기서 더 나가 ‘길이라도 좋다, 아니라도 좋다’라는 오프로더의 자신감이 어떤건지 미루어 짐작 된다)
아직도 저렴한 충전비와 유지비
고속도로 반값은 장거리 여행에서 늘 덕을 본다. 인천항에 주차하고 며칠씩 섬에 갔다 오면 공영주차장 반값 할인에 새삼 감사한다.
충전비는 아무리 급속이라도 휘발유 3분의 1 가격이라, 단가 신경 않고 충전기가 보이면 그냥 가서 꽂는다. 조금이라도 싼 주유소를 찾는 내연기관 시절 버릇은 이제 안녕.(실은 그때도 딱히 싼 주유소를 찾아다니진 않았다. 그 수고로 아끼는 돈보다 마음의 평온이 중요하다 생각해서.)
비슷한 가격(5,900만원)으로 살 수 있는 휘발유 차량이 대략 320i나 330i 정도일텐데. 이걸 샀다면 일단 고급유 넣을지부터 고민했을 듯.
각종 아이오닉 옵션/장비 후기
디지털 사이트 미러, ‘미리 와 있는 미래’를 왜 안 담?
가격이 120인가 하는데. 가격을 감내할 수 있다면 안 달 이유를 못 찾은 옵션. 어지간한 드레스업 튜닝보다 이게 훨씬 더 아이오닉을 전기차스럽게 만들어 준다.
1만킬로 달리는 동안 불편한 적이 있었나? 굳이 꼽자면 후진 주차할때 거리감. 이게 아무래도 거울보다는 원근감이 덜 느껴지더라고. 굳이 표현하자면 화면에 보이는 차들이 평면의 종잇장처럼 보이는 느낌.
아, 얘네가 고장나면 짤없이 목을 퐉퐉 꺾어 뒤를 보거나 룸미러로 봐야하는데. 그렇다 해도 브레이크 파열처럼 정말 치명적인 상황이냐하면 또 아니거든.
주행보조장치의 발전, 차선변경 기능은 속 터짐
i30 -> k5 -> 아이오닉5로 변경하면서 현대기아의 주행보조 변천사를 경험했는데. 당연히 최신 시스템이 들어간 아이오닉이 가장 똘똘한 건 맞다.
도로 곡률이 높아도 잘 잡고 간다. 아예 원을 돌아야 하는 인터체인지도 꽤 잘 잡고 가는데. 높은 곡률에서는 내가 쫄려서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핸들을 잡게 되더라.
IC 나가는 것까지 똘똘하다는 테슬라에 비빌 수준은 아니지만. 계속 발전하는 건 인정. 하지만 진짜 편하게 보조하려면 아직도 갈 길 멀었다는 느낌.
깜빡이 켜면 자동으로 차선 변경해주는 고속도로 차선변경 기능은 진짜 ‘있긴 있다’ 수준. 조선 땅에서 이걸로 운전하려면 경부고속도로 새벽 3시 이후부터 가능.
자동주차 기능도 있긴한데. 파킹 버튼 누를때 안내 팝업 뜰때야 ‘이 차에 이런 기능이 있구나’ 하며 안 까먹게 됨. 차선변경 기능도 속터지는데 자동파킹이야 말해 뭘할까. 진짜 킬러 기능이 되려면 주차장 입구에서 사람 내리면 빈자리 찾아 들어가야겠지.
디지털센터미러, 뒷자리 짐 많이 싣는다면 추천
아이오닉5 PE 전모델은 후면 와이퍼가 없어 사제로 많이 달았다는데. PE부터 와이퍼가 달려나와 그 이유 때문에 디지털미러를 달 필요는 없고. 캠핑처럼 트렁크나 뒷자리에 짐을 많이 실어 후방 시야가 가려지는 상황이 많을 때 유용.
이건 디지털사이드미러와 달리 유리 거울과 함께 붙어 있어 둘을 번갈아 가며 쓸 수 있으니 고장나도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디지털사이드미러 대비 화질이 두 급은 낮아 보이는 게 문제. 디사미가 4K 느낌이면, 디센미는 이보다 두 급 낮은 HD 정도? 비오는 날 체감은 480p.
게다가 미러 자체가 꽤 빨리 뜨거워진다. 전반적으로 하드웨어를 좀 싸구려 집어 넣은 듯. 다음 세대엔 거의 명확하게 하드웨어 업글이 될 듯.
보스 스피커? 그냥저냥……
그냥 내가 큰 소리로 부르면 여기가 콘서트 홀이지 뭐.
그 외_SUV와 세단, 그 어중간에서 오는 일장일단
SUV와 세단 사이 어중간한 높이가 나같이 앉은 키 큰 사람에겐 축복이다. 세단 지붕에 앉으면, 특히 선루프까지 들어간 세단이면 아슬아슬하게 지붕에 닿기 마련인데. 아이오닉은 감사하게도 천장에 여유라는게 생긴다.
마찬가지로 캠핑 장비가 세단보다 더 많이 들어가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SUV보다는 적재공간이 작고. 트렁크 라인이 쿠페처럼 떨어져 적재에 더 많은 손해를 보는 것도 실용성 관점에서는 단점.
차고 역시 승용차보다 높아 강원도 여행에도 자신감을 준다. 오프로드가 가능한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세단보다는 높으니 캠핑장 진출입로에서도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당분간은 차 없다 말해야하는 신세
청라 전기차화재 이후 반 농담으로 친구들한테 차 없다고 말하고 다닌다.
전기차에 대한 대중의 불안은 엄연히 실제한다. 과학적으로 내연기관에 비해 어떠저떠하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건 나중에 모든 게 진정된 후의 일이다.
전기차가 내연기관에 비해 화재 진압이 더 어렵다는 건 현 시점에서 분명 사실이고. 그 외 몇가지 오해를 푸는 작업은 전기차 차주인 내가 나서서 할 일도 될 일도 아니다.
마차에서 자동차로 넘어갔을때도 이런 혼란을 겪었을 것. ‘자동차는 위험한 물건이니 아직은 때가 아니다. 마차가 더 안전하다.’
일면 맞는 말이다. 다만 미리 와있는 미래가 널리 퍼지는 걸 거스를 순 없을 것.
다음에 다시 차를 산다해도 당연히 내연기관이 아닌 전기차다. 아예 사치재로 911 같은 걸 산다면 다른 이야기. 여기서 더 나아가 자율주행 덕분에 차를 구매할 필요가 없어지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