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관광지 두타연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진다. 언제든 갈 수 있다면 안 가고 싶어진다.
동남아가 한국 정반대편에 있었다면 한국인이 가장 선망하는 여행지가 되었을거라는 빠니보틀 말처럼. 여행지는 희소성 자체가 매력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양구 두타연은 매력적인데, 반대로 그 매력을 빼면 고만고만한 곳이다.
두타연에서 금강산까지 34킬로미터. 여긴 조선시대부터 금강산 가는 길목이라, 빗대자면 경부고속도로 만남의광장 휴게소 정도랄까. 애초에 이 여행지의 본체는 금강산이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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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안보 관광지는 대개(아니면 모두) 38선 이북에 있다. 군 미필자 분들은 휴전선과 38선을 혼동하던데. 한국전쟁 휴전 날인 직전까지 서로 죽고 죽이며 땅따먹기 한 끝에 세운 게 휴전선. 강원도는 좀 더 북진했기 때문에 동쪽이 높고 경기도 지역인 서쪽은 밑으로 내려 온 형상이다.
두타연이 있는 양구는 그 죽고 죽이는 전투가 마지막까지 치열했던 격전지 중의 격전지. 그래서 전쟁사 차원에서는 의미가 깊은데, 일반 관광객이 체감하기에 매력적인 여행지일지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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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소에서 개인별로 GPS 달린 목걸이를 제공한다. 그간 다녀 본 안보관광지 중에서도 가장 철저하게 관광객을 모니터링 하는 곳이었다. 역으로 이런 경험 자체가 관광지로서 매력일 것.
여행 바로 전 날은 포크레인 기사가 두타연 내부 CCTV 선을 끊어먹어 바로 관람객 입장이 중단됐다니. 아주 빡세게 관리하는 공간이다.
관광객 규모가 훨씬 큰 고성 통일전망대보다 한층 엄격한 듯 한데. 아마 양구 산세가 험해 작정하고 월북하려는 사람은 잡기 어렵기 때문 아닐까. 반면 고성은 뻥 뚫린 동해바다라 관리와 통제가 쉬운 지형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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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S 목걸이를 지급받는 출입소의 사진찍는 곳.
확실히 국내 관광지도 조형물이나 포토스팟 질이 높아지고 트렌디해졌다는 걸 느낀다. 쨍한 색 배열 덕분에 사진 찍고 현장에서 바로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면 엄청 쨍한 색감이다. 촌스러울지언정 관광지에선 우중충한 색감보단 쨍한게 반응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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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한지 두달째라는 문등리 미니어처. 색감은 물론 미니어처 하나하나의 퀄리티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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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연 코스에 당도하면 해설사와 함께 파란색 단축 코스를 돌아보는데 얼추 1시간 소요. 빨간색 긴 코스는 아예 개방이 안 되어 있는데. 거리를 보면 얼추 세 시간은 필요할 듯.
전시된 콘텐츠를 다 즐기려면 해설사와 동행하는 시간의 두 배 정도는 들여야 한다. 즉 다 보려면 2시간은 필요한데, 여기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워낙 한정적이라 쉽지 않다.
고성 통일 전망대는 관람 가능한 시간을 정해놓고 알아서 보되 그 안에 나오라는 방식인데. 여기는 군인이 곳곳에 배치돼 뭔가 관광객 밀어내기를 한다는 느낌까지 든달까.
여기는 과연 장병들에게 꿀보직일까? 육체 강도만 보면 그래 보이지만 민간인 상대가 더 피곤하다. 차라리 탄약고를 지키거나 훈련 뛰는 게 육체적으론 힘들어도 정신적으론 나아. 민간인 상대하면 사회 생각 나고 머리 속만 뒤숭숭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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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된 걸 볼때마다 사진 찍는 M48. 우리 소대에서 고정포라는 이름으로 엔진 덜어내고 포만 살려 말 그대로 고정시킨 포로 썼는데. 아마 지금은 영구히 치워졌을 듯. 예전 고정포 진지 근처에 무슨 박물관 같은게 생긴 걸 보니.
예전 두타사가 있던 절 터에는 DMZ를 컨셉으로 한 작품들이 전시 중인데. 설치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평하는 게 우습긴 하나. 전체적으로 작품 퀄리티도 높지 않아 보였고, 비무장지대 공간과 맥락이 맞나 싶은 것도 있었다. 애초에 유력 관광지로 양성하기 어려운 어정쩡한 두타연의 포지션 때문이기도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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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철조망을 잘라 만든 꽃은 인상깊었다. 전쟁 상징물을 평화의 상징으로 바꾸다니.
두타연 초입에도 철조망으로 만든 아홉송이 대형 백합이 있는데. 양구 일대 치열한 아홉 번의 고지 전투에서 돌아가신 분들께 바치는 헌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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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널부러진 포탄 껍데기. 이게 작가들의 설치미술보다 훨씬 더 강렬한 작품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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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을 너무 맞아 높이가 낮아졌다는 능선. 불과 70년이란 시간 만으로 인간의 격돌을 퍼렇게 덮어버렸다.
두타연의 주인공은 당연히 두타사가 있던 터 옆의 연못과 폭포인데. 딱히 이렇다할 장관은 아니었다. 역시나 금강산 길목 휴게소 느낌이고. 풍경이 장관이라기 보단 역시 군사 안보 관광지로서 의미가 있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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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다 두타연 사진.
박수근 미술관
나간 김에 인근 여행지를 최대한 다 둘러보는 형태가 일반적인 국내 여행이긴 한데(생각해보니 해외 패키지도 마찬가지네). 가볼만한 여행지는 하루를 오롯이 투입해도 될 만한 콘텐츠가 있다.
두타연도 박수근 미술관도 모두 최소 반나절 씩은 찬찬히 둘러봐도 좋을 곳이지만. 패키지 여행은 그런거 없이 일행 잘 따라다녀야 한다.
물론 패키지의 장점도 분명하니, 패키지로 먼저 와 보고 좋으면 나중에 혼자서 가는 형태가 되면 좋을 것. 일단 봐야 알 수 있고, 알고 나면 더 많이 보이니. 한번은 따라와서 보고, 다음엔 알면서 가 보는 것.
그의 유작전을 처음 본 게 60년대 말이었는지 70년대 초였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근래의 전시회에 비해 분위기는 상당히 썰렁했었다. 하지만 그의 그림값이 비싸다는 것을 그때 거기서 처음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놀라움이 지나쳐 억울하고 분해서 가슴이 아릴지경이었다.
50년대초, 한때 그와 한 일터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그가 얼마나 신산스럽고 굴욕적인 환경에서 싸구려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나를 보아왔고, 죽는날까지도 그림으로 호강 한번 못해보고 그저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온게 고작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후에 오른 그림 값이 남 좋은 일만 시킨것 같아 억울했던 것이다.
나의 속물 근성으로는 사후의 영광보다는 생전에 명성도 좀 누리고 경제적 풍요도 좀 즐기지 못한게 아쉽고 분해서 정작 그림은 안중에도 없었다. ( ….. )
이번 30주기 전을 보며 행복했던 것은 처음으로 그의 그림을 소장한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이나 갖고싶단 욕심없이 볼 수 있어서였다. 그의 그림을 천천히 둘러보는 사이에 마치 오랜 객지생활로 상처받고 황량해진 심신으로 고향집에 돌아가 고단한 몸을 쉬다가 문득 해어져 너덜대는 벽지 사이로 드러난 흙벽의 균열을 보며, 그 구수한 냄새를 맡았을 때 뼛골까지 스며옴직한 평화와 비애를 맛보았다. 평화가 거의 완벽했던 것은 비애가 스며있기 때문이었다. ( ….. )
그렇다고 예술가는 가난해야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있다고 주장할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 흔해빠진 파리나 뉴욕은커녕 미술학교도 못가봤고, 세계화 소리는 더군다나 못들어봤을 그가 세계 그림 시장에서도 제값을 받을 수 있는 몇 안되는 화가라는 것은 이 아니 유쾌 한가.
박완서, 「박수근 30주기 전을 보고」
예술가는 술에 절고 가정은 도외시하는 한량이라는 게 스테레오 타입인데. 적어도 박수근 미술관에서 만난 박 화백은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가장이자 성실하게 돈벌이를 하는 생활인이었다.
작품을 봐도 불꽃같은 삶 뭐 이런 느낌보다 아낙네와 아이들, 가족과 노동 같은 걸 그리는 걸 보면 진짜 착실한 생활인이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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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티스트 청년 박수근의 프로포즈 멘트 참고. 진심과 기세는 참고하되 내용은 절대 참조 말 것. 성인지감수성의 심각한 결핍으로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 있음.
박수근씨가 누군 학벌이 있을까마는 그분은 초등학교도 못 나왔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이 일본사람이었답니다. 이 사람이 그림을 참 좋아하고 잘 그린대요. 물론 화가는 아니죠. 그래도 박수근이 4학년 때 그림을 보고 감탄을 하더랍니다.
야아 넌 천재다. 천재니까 다른 거 다하지 말고 그림만 그려라. 그 학교를 졸업했는데 중학교를 갈 돈이 없거든요. 간다면 춘천중학을 가야되는데 못간다 그랬더니 갈 필요가 없다. 그림만 그려라. 그래서 그림만 그린 겁니다. 학교를 나와도 그 선생의 지도를 받는 거죠. 그 선생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학벌 이란게 무슨 소용 있느냐. 학벌이란 것은 무엇을 잘하기 위해서 얻는 자격증이다. 그기 없어도 잘하믄 그 이상이다. 너는 미술에 대한 역사를 공부 할 필요가 없다. 그러고 미술에 대한 대가들을 연구할 필요도 없다. 넌 오직 네가 하고싶은것만 그려라.”
이 말을 박수근 씨가 울면서 얘기합디다. 그런데 이게요, 보통 얘기가 아니에요.
황금찬,「국립예술자료원 구술채록문」 중에서
구체적인 맥락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박수근 화백이 유학도 하고 공부도 체계적으로 했다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어떠한 천재도 맨 땅에서 높이서진 못한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더 높이 보는 게 현대의 천재일진데.
“1926년 프랑스 밀레의 만종을 원색 도판으로 본 후 깊은 감동을 받아 그림에 더욱 열중했다”고 되어 있는 걸 보면. 박수근도 역시나 미술사 거장의 어깨 위에 앉은 경험으로 한국 미술사를 끌어올린 인물이라고 봐야겠지.
다만, 압도적인 실력이 있다면 학벌은 부차적인 건 맞지. 대부분의 범재는 학벌로나마 인정 자격증을 받아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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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도 고양이를 좋아할 수 밖에 없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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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미술관에 눌러 사는 듯한 고양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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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군립인데도 불구하고 확실히 다음 세대 박물관인게 느껴졌다. 조경부터 건물 구조, 전시 방식 등에서 구태의연한 걸 답습하는게 아니라 곳곳에 새로운 시도가 보였다. 만지고 참여할 수 있는 콘텐츠가 전시관 곳곳에 꽤 높은 퀄리티로 산재해 있다.
후기
- 두타연은 자연이 멋진 관광지가 아님, 안보 콘텐츠를 만나러 가는 곳
- 박수근 미술관은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넓은데다 밀도까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