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보며 내용과 별개로 인상 깊은 일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GPT가 그 어떤 온/오프라인 독해 수업보다 고전 독파에 유용하다는 것. 나머지 하나는 앞으로도 니체 책은 활자 그대로 다 보고 곱씹다가는 세월 다 가니 개념 위주로 봐야겠다는 것.
GPT에게 ‘지금 나 무슨무슨 책 읽기 시작했어. 여기 나오는 개념 중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볼게’라는 아주 간단한 프롬프트 세팅 한 번이면 바로 최고의 독해 강사가 된다. 유명 고전 독해 온/오프라인 강의보다 압도적으로 효율적이다.
물론 내 지식 수준이 질문 수준을 결정짓는지라, 내가 아는 수준 안에서 점진적으로 지식의 지평을 넓혀나가겠지만. 그건 세계 석학의 강의를 보더라도 어차피 마찬가지 아닌가.
받아들일 역량이 안 되면 소 귀에 경 읽기는 마찬가지. 오히려 GPT한테 물어보기 위한 질문을 작성하는게 독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행위가 돼 학습 밀도가 더 높아지는 듯.
다른 하나 깨달은 점. 니체 글이 독특한 문체와 사고체계로 쓰여진거라 난해하다고 이미 듣긴 했으나 이 정도인 줄 새삼 확인했다. 이걸 한 문단씩 GPT한테 독해를 부탁했더니. 니체 시대와 그 지식의 배경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야 하더라고.
뭐랄까. 지금 내가 10대 은어로 쓴 커뮤니티 글을 보면 감을 못 잡는 거랑 비슷하달까? 디시체나 일베체가 있듯. 니체는 니체체가 있더라고. 이걸 활자 하나하나까지 독파하려면 초기에 나가 떨어지겠더라. 개념만 잡자.
“신은 죽었다!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초인이 되어 자기 가치를 창조하라!”
GPT가 니체 철학의 정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준 것.
- 신은 죽었다 : 기존 기독교 가치는 무너졌다.
- 허무주의를 극복하자 : 기독교 가치체계의 선과악, 살아야만할 이유가 사라지면서 필연적으로 ‘삶의 목적’ 따위도 사라졌다. 그건 현상이고. 그래서 그 현상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해야하나? 이에 대한 답이 초인
- 초인이 되자 : 매번 죽었다 깨어난대도(영원회귀), 똑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최고의 선택을 하고 살자.
니체는 헬조선 특화 인재
헬조선에서 잘 생존하려면 ‘노오오력’이 필요한데, 니체야말로 시니컬한 시선의 ‘노오오력(해봤자 되겄나)’이 아니라 원영적 사고의 극에 달한 ‘노오오오력(영원히 같은 날이 반복된대도 최선의 나날을 만들겠어)’을 주장하는 사람 아닌가.
니체가 말하는 ‘초인(위버맨쉬)’이야 말로 헬조선 특화 인재상이다.
초인과 초인 호소인
초인을 주구장창 부르짖지만 정작 본인은 초인 경지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호소인으로 삶을 마감한 인물.
심지어 니체가 짝사랑에 가까운 교류를 했던 걸로 보이는 ‘루 살로메’는 니체를 ‘초인(Übermensch)을 말하면서도 자신은 초인이 되지 못했던 인물’로 분석했다니. 같은 수컷으로서 진한 애잔함과 동지애까지 느껴진다.
극도로 쇠약한 육체, 평생 따라다녔다는 두통, 극심하게 나빠진 눈, 중년에 정신착란 증세로 마차에서 쓰러진 이후 죽기 전 12년은 반 식물인간으로 지내다 간 사람.
너무 역설적이고 대비되어 오히려 그의 초인 호소가 더욱 설득력있어 보일 정도.
헬조선 40대에겐 쇼펜하우어가 인기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같은 책이 몇년전부터 인기더라고. 헬조선에서 40대에 접어들면 세상 뜻대로 안 되는 거 알게 되고. 그럼 허무주의에 가까워지거든.
그때 이름 들어본 유명 철학자인 쇼펜하우어 우산 밑에 들어가고 싶어지는거 아닐까? 일단 불혹에 내리는 급한 비는 피해야 하잖아.
쇼펜 아저씨의 ‘인생은 고통이다, 원래 그런거다, 딱히 생에 꼭 해야하는건 없다’까지는 니체도 인정. 근데 결론이 서로 다르더라고.
쇼펜하우어는 욕망 버리고 살라지만, 니체 입장에선 큰일 날 소리. 권력의지를 불태워 초인이 되야지!
역시 헬조선의 주류 철학은 쇼펜하우어보단 니체일 수 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는 응급처방, 니체는 스팀팩.
니체 아저씨 말 듣고 술은 줄이자
니체는 술을 아주 부정적으로 봤는데, 가뜩이나 두통이 심한지라 그 시대 허접한 증류술로 만든 고약한 술 마시면 숙취 감당이 어려웠을 거다.
매일을 똑같이 살아도 예스예스할 만한 나날을 만들어야 하는데. 술은 현실에서 도망치게 하는, 기독교의 천국 비슷한 거라고 봤던 거지. 당장은 힘들어도 천국에서 보상받을거야 -> 당장 오늘 일은 힘들었지만 술이 주는 환각 안에서 행복하자. 근데 이 둘을 다 현실도피로 본 거지.
현실에서 도망치지 말고 맞서야하는 게 니체. 노년에는 좀 쉬면 안 되냐니까 ‘너는 100미터 달리기 결승선에 다다랐으니 이제 속력을 늦추겠냐’고 노발대발 했다는 게 이 아자씨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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