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 혐오
힘이 약하거나 수가 적다고 선한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힘이 강하고 수가 많다고 악도 아니다.
혐오도 분명 생존에 필수적인 인간 감정이었을 것. 원시시대엔 적과 동지로 빠르게 이분화 해 입장을 확실히 않은 조상. 즉 빠르게 적을 혐오하지 못한 인간은 조직에서 배제돼 굶어죽거나 맞아 죽었겠지.
전투경찰로 군생활 한 친구들 이야길 들어보면 양가감정이 느껴진다.
데모꾼 무리의 잔인하고 격한 데모 방식에 대한 적개심.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방패 하단을 뾰족하게 갈아 날을 만들어 찍으며 맞설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들이 며칠씩 틀어 놓은 엠프에서 나오는 노래가 참 좋아 저절로 외웠다거나. 그들 주장이 또 맞는 말도 있다는 등의 양가감정.
장애인 시위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건 마찬가지. 박근혜 때 장애를 방패 삼아 행패 부리는 장애인 정치깡패 집단이 해결사로 활동했다는 건 정치판에서 유명한 이야기.
장애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현상일 뿐. 사시미로 누구는 회를 뜨고 누구는 사람을 찌른다.
오직 당장의 생존을 위해 빠르게(그게 섣부르더라도) 이분법적 사고를 해야하던 시절이 아닌데. 문명사회에서 계속 원시형태로 살아가다 보니 놓치는게 많다.
전문가 추천 vs. 지인 추천
행동을 변화시키는 찐 설득이 되려면, 설득하는 이에게 두 가지 자격이 필요하다. 첫번째가 전문성. 두번째가 관계성.
전문성은 이 문제에 대해 잘 안다는 걸 학위나 라이센스나 레퍼런스로 입증해야 한다. 관계성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거라는 신뢰 입증이 필요하다.
살사 수업에선 제 1의 불문율이 있는데. 바로 수강생 간에는 춤에 대해 어떤 형태로건 지적하지 말 것.
지난주에 산 전자제품이 리뷰어한테 낮은 별점 받아도 기분 상하는 게 인간인데, 하물며 자기가 자기 몸으로 추는 춤을 지적받으면 거의 본능에 가깝게 상처를 받는다.
특히 남녀가 파트너를 이뤄 추는 사교춤 특성상. 상대가 아무리 선의로 조언해도, 남성성 여성성에 대한 이성의 공격으로까지 받아들여진다.
어떤 경우 선한 의도 따위는 무의미하다. 압도적인 전문성과 확실한 신뢰관계를 동시에 확보하지 않는 한, 섣불리 설득하려 들지 말 것.
주장하다보니 마이너리티가 된 건가, 마이너리티가 되고 싶어 주장하는가.
극단으로 치우친 사람이 항상 틀린건 아니다. 지동설이 극단주의던 시절도 있었다. 어떤 음모론은 사실로 밝혀지기도 한다.
그런데 자기 주장을 열심히 하다보니 사회에선 그 포지션이 극단인 경우가 아니라. 선후 관계가 바껴 소외받고 박해받는 그 포지션 자체가 중요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절대선과 절대악을 상정하고, 외부 박해가 강해질수록 우리 조직이 옳다는 신념이 강해진다. 세상과 환경이 바껴도 영영 구석으로만 숨어 들어가는 것 같은 사람들.
1998년에 예언한 휴거가 오지 않아도. 다른 어떤 논리를 갖다 붙여 다음 휴거를 예고하는 이들.
사실이 중요한가? 그걸 지켜서 뭘 얻으려고?
대학시절 즈음엔 훨씬 더 날 서 있었다. 삼성을 비판했고, 대기업의 홍보 마케팅 방식도 비판했고, 주식시장이 사회에 가치를 주는게 있는지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아니, 이런 거대담론에 대한 날선 비판은 괜찮다. 오히려 생활인이랍시고 사회에 눈 감아버리는 걸 걱정해야지.
문제는 생활인으로 내 곁에 있는 사람과 논쟁할때다. 친구, 동료, 가족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상대가 틀린 사실관계를 이야길 할 때가 있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욕하거나 내 이념과 반대되는 주장을 할때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뭐 어떤가? 사실관계를 정정하면 분위기는 싸해질거고, 논쟁으로 이념을 갈아타는 경우는 현실에서 본 적도 없다.
진짜 사실관계가 중요한가? 아니면 ‘너는 모르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는 우월감 표현이 중요한가?
나는 노선을 정했다. 사실보다 관계가 중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해도 나는 일단 동조할거다. 어차피 내 동조와 상관없이 우주의 질서는 지켜질거고, 덤으로 내 관계도 유지될테니.
정말정말 사실관계를 정정해야 할 때는 두 번 뿐. 통장 비번과 현관 비번. 거기에 더해 네비게이션이 낭떠러지로 안내해줄때.
소통 잘 하는 조직, 그럴 각오가 된 조직
10여년 전 IT업계에서 넷플릭스 내부열람용 기업문화(컬쳐 덱) 문서가 알음알음 입소문을 탔다. 나중에는 아예 정식 출판이 됐고.
거기 ‘압도적 솔직함’이란 개념이 나오는데. 넷플릭스에 모인 사람은 모두 프로고 같은 목적을 지향한다는 걸 전제로, 업무에 관해 그냥 확실히 솔직하게 말하자는 거다.
이 개념을 소개하는 뉴스에서 예로 들었던 건 ‘지난주에 배포한 기능은 바보같았어요’라고 동료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식.
쿠션어로 엄청 돌려서 말하는 교토식 화법이나 무기명 마음의 소리 방식은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엄청 많이 든다. 정확히 전달되지 않을 확률도 높고 기간도 지연 된다.
만약, 그냥 압도적으로 솔직하게 말할수 있다면. 그게 가장 확실하고도 효율적이다. 마치 개미가 페로몬을 통해 집단 소통과 사고를 한다는 것처럼. 단, 그런 방식으로 소통 가능한 조직이라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이걸로 우리 팀원들이랑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상적인 방식이긴 한데. 여긴 조선땅이고 우린 넷플릭스가 아니므로 불가하다는 자체 결론이 나왔다.
무슨 말을 하냐 보다 어떻게 말하냐, 말 보다 몸
설득하기를 책상에서만 논하면 어떤 텍스트를 쓰고 어떤 말을 해야하냐에만 집중하게 된다.
실제로는 말로하는 버벌랭귀지 보다 몸짓을 포함한 넌버벌랭귀지에서 얻는 정보가 훨씬 많다. 이거 신문방송학 전공필수 시간에 그 비율까지 배우는데 등록금과 함께 꼴깍해서 기억은 안 나네.
우리가 소크라테스나 유시민이라 해도 논리적인 글과 말로 상대 진영을 설득할 수는 없다. 심지어 유시민은 왕성히 활동하던 현역시절 ‘맞는 말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분 나쁘게 말하는 정치인’이란 별명이 있었다.
이런 사람이 티비에서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TK 부모님이 맘을 돌리실까? 저 말 많은 빨갱이 새끼 또 티비 나왔다 하실까.
홍보팀으로 입사해 기자와 홍보팀 간 다양한 일화를 들었는데. 홍보팀 논리에 감화되어 기사를 내리거나 정정해 줬다는 기자는 단 한 명도 못 봤다.
홍보 담당자가 먹여살려야할 처자식 있으니 무릎 꿇으며 한번만 봐달라 통사정해 내려줬다는 사례는 10번도 넘게 들었다.
기계는 팩트로 움직이지만 사람은 감정으로 움직인다.
이해하려 들지 마라, 외워라. 돌려막기 3단계
- 그럴 수 있지_공격성 낮추기
- 아, 진짜요! 맞아요!_관계형성
- 씁…후…_말할수 없을땐 엄한소리 말고 곤란한 한숨쉬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