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할 수 없는 떡진 볶음밥

어제 저녁, 포항시립 도서관 근처 반점에서 먹은 볶음밥 곱빼기.

양이 곱빼기스럽지 않은 것은 용서하겠다.

짬뽕 국물 더 달라는데 우동 국물 갔다 준 것도 그러려니 해.

근데, 볶음밥이 도로 가에 녹은 눈처럼 질척거리는 건 너무 하잖아.

 

화가 났다.

집에서 단련되서 맛 없는 음식에 관대한 난데 왜 화가 나는 걸까……

눈삽으로 진눈깨비 푸듯 볶음밥을 퍼 넣으며 생각했다.

 

아하~ 얼마 전 두류도서관 식당에서 먹은 오므라이스도 이렇게 질척했지.

어차피 다 같은 밥이라고 볶음밥에도 쓰고 공기밥에도 쓰는 건 축구공을 농구할 때도 쓰고 골프 칠 때도 쓰는 거나 한가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야!

밥알 한 톨 한 톨이 고소하게 볶아져야 하거늘.

허허~

 

그리고 오늘 아침,

불현듯 떡진 볶음밥(이하 떡음밥이라 하자)과의 악연의 근원이 떠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첫 번째 소개팅녀와 점심 약속을 한 날.

준영이 자취방에 얹혀살기 시작한 둘째 날.

요리도구도 낯설고 밥솥도 낯설어 아침 밥을 지었는데 떡밥이 됐다.

그 떡으로 볶으니 결국 나온 건 떡음밥.

 

어쨌든 그걸 싸 들고 점심 약속에 나갔다.

3월 말에 개념 없이 부는 바람을 피해 들어간 자연대 강의실.

3면에 칠판이 붙어있어 3차원 미적분을 연상케 했기에 논리연산을 처리하는 좌뇌에 부하가 걸리는 장소였다.

 

점심 대접을 하려고 떡음밥을 담은 원통형 도시락을 꺼내는데……

잠시 후 계속됩니다……

 

가 아니고, 아우 씨, 케이블 중간광고 짜증나!

 

……도시락을 꺼내는데,

제기랄 보기라도 좋아야 하는데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밥이 반달모양으로 떡 져 있는 거다.

황급히 반대로 기울여서 톡톡 치고 뚜껑을 열었다.

밥에 윤기 따윈 없었다.

숟가락질은 눈삽으로 진흙 뜨는 느낌……

맛은 고등학교 때 수학 목표점수였던 50점도 감지덕지.

 

이럴 수가!!!

실패를 모르던 나의 볶음밥 요리史가 한 번에 무너지는 순간

516정희가 탱크 몰고 청와대를 함락할 때 대한민국 민주주의 정통성이 무너진 것에 비견할 만 했다.

 

그 후로 떡 진 볶음밥을 볼 때 마다 화가 나는 건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분노.

그 때 밥 물이 1cm만 낮았어도 역사는 달라졌을 것.

 

과유불급, 적재적소를 이렇게 배우며 자란다.

 

(09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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