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에서 돌아온 밤에 램프 밑에 앉아서 당신의 정맥에 관하여 적는다.
그해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렸고 빗속에서 나무와 짐승들이 비린내를 풍겼다. 비에 젖어서, 산 것들의 몸 냄새가 몸 밖으로 번져 나오던 그 여름에 당신의 소매 없는 블라우스 아래로 당신의 흰 팔이 드러났고 푸른 정맥 한 줄기가 살갗 위를 흐르고 있었다. 당신의 정맥에서는 새벽안개의 냄새가 날 듯했고 당신의 정맥의 푸른색은 낯선 시간의 빛깔이었다. 당신의 정맥은 당신의 팔뚝을 따라 올라가서, 점점 희미해서 가물거리는 선 한 줄이 당신의 겨드랑 밑으로 숨어들어갔다. 겨드랑 밑에서부터 당신의 정맥은 당신의 몸속의 먼 곳을 향했고, 그 정맥의 저쪽은 깊어서 보이지 않았다……
– 김훈, ‘저기 네가 오고있다'(2004), ‘작가들의 연애편지’에서 재인용
다행이다.
아버지가 외아들이라 친척의 전화 한 통 없는, 주말 보다 한산한 추석을 보내는 중에
우연히 뽑아든 책
거기서 김훈의 연애편지 한 귀절을 보며 떠올릴 당신이 있다는 게
당신도 나와 가랑비 내리는 습한 길을 걸었고
소매 없는 블라우스를 입었으며
누구보다 빛나는 정맥을……
아니, 정맥은 어찌되든 좋다.
그 날 적당히 비를 마신 가로수보다 당신이 더 싱그러웠다.
우산 아래 살짝살짝 닿고 떨어지길 반복하던 당신의 체온 덕에
아직 난 36.5도를 유지하나 보다.
당신…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