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법의 달인, 시인 안도현

<strong>그리운 여우</strong>책 제목 : 그리운 여우
저자 : 안도현
정가 : 7000원 (할인가 : 5250원)
출판사 : 창비(창작과비평사)
출간일 : 1997. 07. 01

어린 눈발들이, 다른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겨울 강가에서


젤 좋아하는 시인을 단 한 명만 뽑으라면 난 안도현.

그는 세상 만물, 특히 풀이나 시냇물 같은 자연물을 친구로 둔갑시키는 멋진 재주를 부린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라는 구절은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첫 구절과 같은 모양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가 바로 그 것.


뜨거운 여름이니까 매미가 우는게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

눈 내리니까 아름다운 나타샤가 생각나는게 아니라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니까 눈이 내리는 것


환경공학과 천문대기학 이론은 이런 시 세계에선 잠깐 접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 나는 누구에게 한마리 매미였던가.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지치지도 않고 울어대던…

일곱 날 만에 끝날지라도


 

구린내 곰곰 나는 돼지 내장

도회지에서는 하이타이를 풀어 씻는다는데

산서농협 앞 삼화집에서는

밀가루로 싹싹 씻는다

내가 국어를 가르치는 정미네 집

뜨끈한 순댓국 한 그릇 먹을 때의 

깊은 신뢰


– 순댓국 한 그릇



생일 아침

나 복이 많아서

교탁 위 양은쟁반 위에

시루떡 김 솟는다

산서면 동화리 신창리 오산리 계월리 봉서리 쌍계리 마하리 백운리 이룡리 건지리 하월리 오성리 학선리 사상리

쌀들, 우리 반에 다 모여 

시루떡 되었다

무럭무럭 김 솟는다


– 생일



시인의 국어교사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런 시들이 시집 곳곳에 있다.

농촌 풍경화 같기도 하고 생활 수필 같기도 한


서울 강남이 아닌 시골 학교 선생이었기에 계속 시를 뽑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나 경북대 기획과 홍보팀 인턴시절, 우리 기획과장님은 행정고시 출신이셨다.

원래는 고등학교 도덕 교사였는데, 경기도에서 교사 생활 하다가 군에 가서는 제자들이 면회도 올 정도로 참 좋았단다.

제대 후에 서울에 발령 받고 나서는 선생하는 맛이 안 난다며 서른 넘은 나이에 아내 뒷바라지로 행시 공부를 시작했다며 아직도 그 때 제자들이 연락 오기도 한다던 과장님.


더 높은 인센티브와 수당, 그리고 더 높은 혈압과 스트레스……

돈 맛 나는 일이 아니라 일할 맛 나는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시 한 편 읽을 수 없는 나날보단

(이라고 쓰면서도 둘 모두를 얻을 궁리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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