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 년 전에는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같은 책으로 쇼펜하우어 아재가 유행이더만. 최근 베스트셀러 매대를 보면 니체가 바통을 이어 받은 듯.
내 이랄 줄 알았다.
한국은 각자도생 사회. 생존을 위해 자기계발이 필수(적어도 필수라는데 동의해야하는) 사회인데. 니체야말로 자기계발서의 끝판왕이거든.
2.
쇼펜하우어가 인생 덧없다는 허무주의로 끝난 반면.
쇼펜하우어 팬이던 니체가 후기에는 그를 까면서 무한 긍정주의자가 된다. 역시 돌아선 팬이 젤 무서운 안티.
각자도생이라는 엔진에 자기계발이라는 신나를 밀어넣는 빠꾸없는 무한긍정맨이 된 것.
3.
며칠 전 사우나하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내 홈페이지 글의 5할은 사우나 하다 착상하거나 다듬은 것들임).
‘내가 아는 니체의 말이, 니체의 의도가. 진짜 니체가 하려던 거 맞나?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 맞나?’
‘근데, 설혹 오해면 어떤가. 내가 니체 지도사 자격증 딸 것도 아니고.’
‘그럼 그건 니체의 말이 아니라 나체의 말 정도로 수정해도 된다. ‘
니체의 말이라 의미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들어보니 괜찮다 싶어 동의하고 의미도 부여했는데. 그거 말한 사람이 니체더라. 이 순서 아닌가.
니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한 니체를 좋아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이런 결론.
4.
근데 전혀 예상 못한 곳에서 니체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양평 메덩골.
이곳 컨셉이 ‘인문 정원’인데. 가드닝 수업을 듣는 지원 님이 정원을 담당하고, 내가 인문학을 담당해.
소설 수난이대의 팔 없는 아빠와 다리 없는 아들의 결합 마냥. 부족한 이들끼리 퍼즐을 맞춰 이 비싼 입장료의 정당화를 시도해 보자.
뭐 이런 생각으로 방문을 복기해 본다.
5.
여기선 입구 공사 가림막에도 니체 문구가 적혀있는데. 그 중 유독 중2 화장실 낙서 같은 문구가 있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맥락이 제거된 채 문장만 덩그러니 있으면 이건 중2 다이어리 문구. 메덩골 정원 전체가 이런 곳이지 않나 싶다.
정원을 이렇게 구현한 의도와 그 맥락을 사전에 듣지 않고 보면. 비싼 돈지랄 정도로 보이는.
6.
‘신은 죽었다’부터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 같은, 전세계 미들스쿨에서 환호하며 다이어리에 적어둘 명언을 많이 보유한 니체 아재.
저 다이너마이트란 표현도 ‘종교에서 나온 기존 가치체계를 날려버릴 나 님이 왔다, 펑!’이라는 은유.
이게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공사장 가림막의 한 줄이 되면. 메덩골 정원에 있는 호프 외계인이 던져 놓은 거대한 돌덩이 마냥. 맥락 죽써버린 장면이 된다.

7.
근데, 이걸 고병권 아저씨는 ‘다이나마이트 니체’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다이나마트의 핵심은 폭발이 아니라 응축이라고.
터지는게 아니라, 터트릴 수 있는 폭발력을 내부에 엄청나게 응축하는 과정과 그 상태에 집중해야 한다고.
폭발력을 응축하는 과정이 바로 니체의 유명한 3단 변신, 낙타 -> 사자 -> 어린이라 볼 수 있고.
그 단계에 이른 사람을 위버맨쉬라 하며, 그 경지까지 위로(위버) 오르기 위해 역설적으로 땅에 깊이 발을 박은 채.
무한히 같은 날이 반복되는 영원회귀 상태가 되더라도 매일 더 이상 없을 최선의 하루를 살기 위해 노력하며 삶을 긍정해야 한다.
이거야 말로 자기계발서의 알파요 오메가이자 성서이면서 불경이자 전부면서 전무 아닌가?
8.
이게 내가 아는 니체다. 실제 니체의 말과 달라도 상관없다.
정원은 개관하면 끝이 아니고 매년 사계절을 지낼 때마다 그 깊이가 응축된다는 면에서.
니체의 위버맨쉬나 영원회귀를 표현하기에 미치도록 적합한 수단 아니었을까.

9.
입장료가 비싸긴 하지만, 이 시설 만든 본전 뽑으려면 실은 이걸로는 턱없다 싶다.
이태원 리움미술관이 떠오른다. 이 시설은 입장료 받아선 전기료 내기도 벅차겠다 생각들만큼 호화로운 시설.
이런걸 만든 사람이면 분명 관종일텐데. 돈을 벌면 누군가는 정치 출마하고 다른 누군가는 이런 시설을 짓곤 하는데.
신기하게도 메덩골을 만든 이는 아주 정성껏 숨어 있다. 의도적인게 분명할 정도로 설립자로서 메시지는 노출하면서도 정작 자연인으로서의 실체는 숨기고 있다.
터무니없이 공들인 정원, 사짜 같을 정도로 야심찬 비전, 그런데도 애써 개인은 숨는다.
이런걸 보면 이 사람, 이 공간은 진짜라는 생각이다.
보통 사짜는 저기 어디 한 군데서는 삐끗해 드러나더라고.



10.
이 정원이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면 보강할 곳이 많다.
애초에 8만원이라는 입장료가 대중과는 조금 거리를 두는 것 같지만.
체감하는 가치는 소비자마다 상대적이지만, 관광지 입장료라는 대중 인식 측면에선 절대적으로 비싼긴 하지.
그 비싼 입장료가 아깝지 않으려면 소프트웨어 강화가 핵심.
누구나 니체를 좋아하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오진 않는데.
그런 상태에서 정원을 물리적인 산책만 해선, ‘번역 안 된 프랑스 영화’ 보는 느낌이지 않을까.
8만원 내고 감탄스러운 화장실 두 번 이용하는 게 아닐지.
11.
아, 근데. 화장실에도 흠이 하나 있다.
예술이 실용을 이겨버려, 불편한 시설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 화장실 문 열림 버튼이 그렇다. 보통 저 스위치는 문을 열고 닫는 게 아니라 불을 켜는 용도 아닌가?
이 역시 기존 가치체계를 전복한 다이너마이트스러운 적용이라면 납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