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깁 붐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 Read more

내 그대가 그리워 허공에 못질을 한다 못이 들어가지 않는다 내 그대가 그리워 물 위에 못질을 한다 못이 들어가지 않는다 – 정호승  ‘못’ ———————————————— 내 그대가 그리워 허공에 삽질을 한다 삽이 떠지지를 않는다 내 그대가 그리워 바닥에 헤딩을 한다 바닥이 물러나질 않는다 내 그대가 그리워 시멘트에 씨를 뿌렸다 싹이 돋아나질 않는다 내 그대가 그리워 …… 이제 그 … Read more

엽서, 엽서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년 혹은 이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 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없는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 Read more

세상의 길가

내 가난함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배부릅니다 내 야윔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살이 찝니다 내 서러운 눈물로 적시는 세상의 어느 길가에서 새벽밥같이 하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 김용택 ‘세상의 길가’ ————————————————- ‘제로섬’ 이론이란게 있지 누군가에게 득이면 다른 누군가에겐 반드시 해가 되어서 그 총합은 결국 제로가 된다는. 내가 가난함으로 세상 어딘가 누구가 배 부르거나, 혹은 내가 자원을 이만큼 … Read more

내 키가 더 컸으면 좋겠다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 문정희  ‘키 큰 남자를 … Read more

이것봐라! 하느님도 외롭다잖아!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 Read more

꼬깃꼬깃 접어 두었던, 부치지도 버리지도 못한 편지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해 버릴까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 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말하지 않은 말  – 유안진 ——————————- ‘혼자만의 특수성’ 이니 … Read more

퍼펙트 맨이 아니어도 살아갈 만하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건 그대의 빛나는 눈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건 그대의 따스한 가슴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지와 잎, 뿌리까지 모여서 살아 있는 ‘나무’라는 말이 생깁니다. 그대 뒤에 서 있는 우울한 그림자, 쓸쓸한 고통까지 모두 보았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전부로 와 닿았습니다. 나는 그대의 아름다움만 사랑하진 않습니다. 그대가 완벽하게 베풀기만 했다면 … Read more

‘빗장’ 떠버린 사랑에 아직은 쓰라릴 친구에게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서럽기만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논둑길을 마구 달려보지만 내달아도 내달아도 속떨림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루종일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떠올라 비켜 주지 않는 당신 얼굴 때문에 어쩔 줄 모르겠어요 무얼 잡은 손이 마구 떨리고 시방 당신 생각으로 먼 산이 다가오며 어지럽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을 닫아보려고 찬바람 … Read more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 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 Read more